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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쌓아놓고 알짜기업 빼먹기

등록 2008-04-1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투자 외면한 채 잉여금 높은 대기업들… 금호아시아나·한화·롯데·두산은 M&A 시장에 베팅</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 546개 제조업체의 2007년 말 현재 유보율(잉여금/자본금)이 675.57%에 달했다. 조사 대상 업체의 잉여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 총액은 358조1501억원으로, 1년 전에 견줘 11.75% 늘었다. 10대 그룹(자산 기준)에서는 삼성의 유보율이 1488%(잉여금 69조8548억원)로 가장 높았고 현대중공업(1398%), SK(1378%), 롯데(1194%), 한진(824%) 순이었다. 10대 그룹의 평균 유보율은 787%로, 2006년 말(694%)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잉여금이 자본금의 8배 가까이 된다. 유보율이 높다는 건 재무구조가 탄탄해 자금 여력이 크다는 것인데,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내부 유보로 쌓아둔 채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쟁보단 안정적 내수 시장

그런데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금호아시아나, 한화, 롯데 그리고 재계 11위인 두산이 눈길을 끈다. 금호아시아나는 2007년 말 잉여금이 4조2059억원으로, 유보율이 12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화는 이익잉여금이 2조4497억원으로, 유보율이 268%였다. 두 그룹 모두 10대 그룹의 평균 유보율에 견줘 훨씬 적다. 왜 그럴까?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이미 많은 현금을 썼기 때문이다. 한화 역시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 잉여금 실탄을 많이 소진했다. 반면, 인수·합병(M&A) 시장에 대형 매물이 나올 때마다 인수의향자로 거론되는 롯데는 잉여금이 13조6483억원으로, 유보율은 1194%에 이른다. 쌓아둔 돈은 워낙 많은데, 롯데 계열사들이 영위하는 사업 내용들을 보면 대규모 투자를 일으킬 필요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롯데는 올 초 대한화재를 인수하는 등 새로운 사업영역 확장에 나서고 있다. 기존의 각종 사업들이 이미 성숙 단계를 지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금호아시아나·한화·롯데 등보다 앞서 두산그룹은 이미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등 알짜기업들을 인수해 재계 1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이들 재벌기업은 지난 몇 년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알짜기업 인수·합병 각축전에서 거액을 베팅해 매물들을 거머쥐고 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외환위기 직후 유동성 위기를 맞고 쓰러졌던 수익성 좋은 기업들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업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즉, 생산·판매하는 제품들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보다는 안정적인 내수 시장에 치중돼 있다는 점이다. 정승일 국민대 겸임교수는 “한화, 금호아시아나, 롯데, 농심, 대림 등의 경우 수십 년간 내수 시장의 독점적 틀 속에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장사해왔다. 내부 유보 현금을 투자에 쓰지 않고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때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며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 기술개발을 한다거나 글로벌 시장에 나가 싸우는 데 큰 관심이 없고, 국내 시장에서 보수적으로 영업해온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막대한 영업이익을 현금으로 쌓아둔 채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근래 들어 알짜기업들을 마구 손에 넣어 덩치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삼성·현대차·SK·현대중공업

실제로 이런 재벌기업들의 업종을 보면, 유통·식음료, 관광·레저, 운송 등이 주력이다. 막대한 추가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이 생명인 고부가가치 제조업이나 생명과학 산업 등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막대한 현금을 투자할 만한 기존 사업이 별로 없다 보니 사내 유보금을 동원해 알짜배기 매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새로운 고용은 신규 투자가 이뤄져야 창출된다. 기존 알짜기업을 인수한 재벌기업들은 오히려 사들인 기업의 주식가치를 높이려고 인력 감축을 시도하기 일쑤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인수·합병 시장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다. 다른 재벌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해온 롯데, 금호아시아나, 한화, 두산 등이 인수·합병 시장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금, 삼성, 현대차, SK, 현대중공업 등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상호출자금지 규제 완화를 기다리며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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