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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공장에 평화는 오는가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정몽구 회장 재판 정세에서 이뤄진 무분규 타결 …더 지켜봐야 하지만 변화의 계기는 감지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9월4일, 현대자동차 노사가 파업 없이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극적으로 타결지었다. 1997년 이후 10년 만의 ‘무쟁의 타결’이다. 그래서 1987년 현대차노조 설립 이후 파업으로 점철돼온 현대차 노사관계가 바뀌는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4만5천여 명을 거느린 국내 단일 사업장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으로, 노동조합운동의 ‘맹주’나 다름없기 때문에 역사적 무분규 타결은 큰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다. 과연 현대차 노사는 대립과 갈등, 분규의 악순환을 끊고 협력적 노사관계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일까? 현대자동차 공장에도 산업평화가 찾아온 것일까?

금전적 사항은 진전, 구조적 문제는 아직

현대차와 산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합의안 중 금전적 내용을 보면, 노사는 △기본급 8만4천원 인상 △성과금 300% △일시금 200만원 △정년 1년 연장 △상여금 50% 인상(총 750%) △회사 주식 30주 지급 등에 합의했다. 회사 쪽은 “회사 주식을 지급한 건 파업 손실 없이 10년 만에 무분규 노사 합의를 이끌어낸 데 대한 격려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올해 임단협에서 노사는 둘 다 곳곳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회사 쪽은 8월24일 제10차 교섭에서 현대차 노사 협상 사상 처음으로 동종 업계의 임단협 타결 수준을 상회하는, 기본급 7만8천원 인상을 포함한 일괄 교섭안을 내놓았다. 뒤이어 상향 조정한 수정안도 잇따라 노조에 제시했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뒤에야 최종 교섭안을 내놓곤 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조속한 협상 타결’ 의지를 분명히 보이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교섭에 응한 것이다.

노조도 쟁의행위로 회사를 압박하던 종전의 협상 구도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노조는 노동쟁의 조정신청까지 내놓고도 조정 기간에 실무협상을 계속 갖는 등 대화의 창구를 열어두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노조는 또 단체협상 결렬 선언과 파업 찬반투표 가결 뒤 9월4일부터 파업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파업 유보 결정을 내리면서 교섭 테이블에 나왔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노사 모두 담합을 하듯 이상한(?) 행동에 나선 이유는 뭘까?

노사 합의안 중 임금 부분만 보면, ‘퍼주기’ 논란을 자초할 만큼 예년을 웃도는 수준이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처럼 회사 쪽이 “무리한 수준(?)까지” 내주면서 적극적으로 무쟁의 타결을 시도한 배경과 관련해, 현대차 안팎에서는 당장 코앞에 닥친 정몽구 현대·기아차회장 선고공판(9월6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회사 쪽은 무쟁의 타결을 이뤄낼 경우 판결에서 집행유예 등 선처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시각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노조 조합원 ㅂ씨(현대차노조 전 간부)는 “정몽구 회장 항소심 재판을 이틀 앞두고 회사 쪽이 대폭적인 양보안을 냈다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공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며 “이번 합의 내용이 대부분 금전적인 사항들이고, 고용안정과 교대제 등 (노사관계와 관련해)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파업 봉쇄하겠다는 포석?

이번 합의안에서 고용안정 대목으로는 △해외 공장 신·증설 계획, 신기술·신기계 도입 등의 계획을 수립할 경우 노조에 설명회를 갖고 노사공동위원회를 통해 심의·의결한다 △전주공장 주간 연속 2교대제는 노사 간 공동 연구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단체협약 내용에 문구를 조금 고친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돈을 풀어 단기적으로 무쟁의 타결을 이끌어낸 것일 뿐 새로운 노사관계 구조를 정착한다는 큰 틀의 구상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ㅂ씨는 “무쟁의 형태로 노사관계가 바뀐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상황은 아니다. 회사 쪽이 내년에도 무쟁의 타결로 가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두세 번 더 임단협을 해봐야 회사 쪽이 전략적 수정을 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상 노동조합도 정몽구 회장 선고공판 시점에 쟁의행위 돌입 시기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등 정 회장 재판을 이번 임단협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노사 모두 무쟁의 타결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이것이 “무쟁의 노사관계로 가자”는 현대차 노사관계의 획기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정몽구 회장 재판이라는 상황적 구도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정몽구 회장 재판이라는 정세가 조성한 무쟁의 타결이고, 회사 쪽의 ‘정몽구 구출작전’이 전개되는 절묘한 시기에 노사 간 실리가 맞아떨어져 역사적 사건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노동조합 내부적으로 볼 때 파업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조합원들이 그동안 “파업해도 손해볼 것 없다”며 집행부의 파업 지침에 따라왔으나, 점차 파업에 대한 피로감과 거부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고, 연례파업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도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현대차 조합원 상당수가 산별노조 전환 투표에 찬성했던 당시 현대차노조의 한 간부는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친구들한테 노동귀족이라고 욕먹고 괴로워하는 조합원들이 많았는데, 기득권에 집착한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산별노조 전환에 찬성한 조합원도 많았다”고 말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 이아무개(전 현대차노조 간부)씨는 “무쟁의 타결로 가면 현장의 다른 정파 조직에서 반발하게 마련인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는 상황”이라며 “무쟁의 타결이 당장이야 좋지만, 이번 선례로 인해 내년에 임단협 교섭을 할 때 노조의 힘이 거세될 것을 우려하는 조합원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볼 때, 회사 쪽의 이번 무쟁의 타결 의지에는 정몽구 회장 재판 말고도 향후 정치적 파업을 봉쇄하겠다는 포석이 함께 깔려 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임금 싸움에서도 파업을 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정치적 파업에 나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차 윤여철 사장은 “이번 합의를 노사 상생의 이정표로 삼아 노조도 오직 회사와 조합원만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무쟁의 타결의 의미를 둘러싸고 현대차 노사관계가 완전히 바뀌는 정도는 아니라도 어떤 변화의 계기가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 이씨는 “회사 쪽이 올해 임단협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질 가능성이나 그 징후가 그전부터 약간 감지돼왔다”며 “올해 현대차에 ‘노사전문위원회’(대표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가 구성된 것도 그런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현대·기아차가 국내 자동차 판매시장의 70% 이상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승용차 값을 올려 독점 이득을 누리고 있고, 잘 팔리지 않는 차종의 경우 할인판매를 하더라도 독점 가격에서 할인된 것이라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며 “결국 독과점이 강화될수록 파업으로 인한 손실은 더욱 커진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의 시장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회사 쪽이 ‘줄 것은 줘서 파업은 피하자’라는 협상 전략으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또 일각에서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빅4’ 진입을 지향하는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무관리 정책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둘러싼 모색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나아가 자동차산업 노조들이 지난해 모두 산별조직으로 전환한 상황에서 자동차산업 사장단이 모여 노사관계에 대한 교감을 나눴고, 이런 사정이 이번 무쟁의 타결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전환의 계곡을 통과하는 중”

이와 관련해 박태주 대표는 “산별조직으로의 전환과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에 따른 여론 부담 등이 구체제로부터의 전환을 압박하고 있다”며 “현대차 노사관계는 큰 틀에서 볼 때 빠른 속도로 ‘전환의 계곡’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조합원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파업 동원 능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고, “(여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파업) 기관차는 간다”는 기존의 전략은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이제 파업을 안 해도 월급을 올릴 수 있구나 하는 걸 조합원들이 처음으로 깨달았고, 이를 변화의 단초로 삼아 새로운 노사관계 체제 형성이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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