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업무량 줄이려고 금융노조가 내놓은 요구안, 지혜로운 전략인가 논란 확산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은행 창구 문을 닫는 시각이 오후 5시에서 4시30분으로 앞당겨진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융단 협정’에 따라 일률적으로 묶여 있던 은행 영업시간을 자율화한 데 따른 변화였다고 공성길 은행연합회 노사협력팀장은 전했다. 영업시간 자율화 조처에 따라 은행들은 공항 지점이나 동대문시장 근방 같은 특수 영업점에서는 밤늦게까지도 영업을 하는 대신 일반 창구의 마감 시각은 30분 당겼다는 것이다.
지나친 인력 축소와 실적 경쟁
은행 창구의 마감 시각을 4시30분에서 3시30분으로 1시간 앞당기자는 제안이 나오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다. 금융권 노사 협상을 앞두고 노조 쪽은 영업시간 단축을 요구사항의 하나로 내걸기 시작했고, 올 들어서도 이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다. 은행권 노동자 단체인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위원장 김동만)은 지난 4월9일 공식 성명을 내어 “은행 창구 영업 마감을 3시30분으로 단축하는 방안을 올해 산별교섭을 통해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고객 불편을 초래한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금융노조는 5월8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창구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올해 임·단협 요구안으로 공식 확정했다. 1980년대의 영업시간 단축이 자율화 조처의 부산물이었다면, 이번의 단축 요구는 ‘노동 강도 완화’를 명분으로 삼고 있다.
금융노조는 인터넷 뱅킹을 비롯해 자동화기기 사용자가 늘면서 은행 창구 이용자는 20%를 조금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고객 불편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또 창구 영업시간을 당기는 대신 ‘찾아가는 서비스’ 등 대체 방안을 강구하도록 요구하겠다고 한다. 일본(9~15시), 싱가포르(9시30분~15시30분), 영국(9시30분~15시30분), 캐나다(9시30분~15시), 스페인(8시30분~14시30분) 등 오후 3시 반 이전에 창구 영업을 마감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는 사례도 주요 근거로 든다.
노조 쪽에서 영업시간 단축 요구의 명분으로 내건 은행 직원들의 노동 강도는 실제 어느 정도일까? 금융노조는 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4월까지 여론·현장 조사를 벌였다. 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금융노조의 조사 결과를 얻어보았다. 금융권 종사자 1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외환위기 이전보다 ‘노동 강도가 강화됐다’는 응답이 77.1%였다. 그 이유로는 61.5%가 ‘업무량 과다’를 꼽았다. 이는 지나친 인력 축소와 함께 과다한 실적 경쟁을 벌이도록 업무를 배당하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금융노조는 해석한다. 주당 초과근무 시간 조사에선 ‘15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31%였으며, 월간 휴일 근무 일수에 대해 75.9%가 ‘2일 이상’이라고 답했다.
금융노조의 이런 설문 조사가 얼마나 보편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당장 반사적·정서적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외환위기 뒤에 업무 강도가 높아진 게 은행권뿐이냐. 안 그런 데가 어디 있는가. 은행원들이야 그래도 월급이라도 많이 받지 않나?” 시샘 섞인 반발감에서 더 나아간 격한 반응도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싫으면 그만두라고 해라. 똑똑하고 일 잘하는 청년 실업자들 얼마든지 널려 있다.” 이번 조사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노조’에서 실시한 것이라는 원천적 한계까지 감안하면 공감대의 폭을 넓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문조사보다는 그래도 설득력을 좀더 얻을 수 있는 게 사업장 실태 조사 결과다. 금융노조가 2003~2006년 9개 시중·국책·지방은행의 5만40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4월에 마무리지은 것인데, 과로사가 한 해 평균 16.5명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심근경색, 뇌출혈, 간경화 등 업무 과다로 인한 과로사로 추정되는 인원이 4년 동안 66명이었다는 것이다. 금융노조는 산하 사업장 전체 임직원 9만8721명(비정규직 제외)으로 대상을 넓혀 추정하면 한 해 과로사는 30.1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8개 요구 항목 가운데 하나일 뿐
노동부의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2005년 기준 산재 사망자 가운데 질병 사망은 1095명(전체 노동자 1105만9193명)이었다. 과로사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질병 사망자가 노동자 인구 10만 명당 9.9명인 셈이다. 금융권의 경우 과로사만 10만 명당 30명꼴이니 일반 사업장보다 3배가량 많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답은 ‘아니다’이다. 금융노조의 조사에선 산업재해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사망자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10만 명의 금융권 종사자 가운데 한 해 30명으로 추정되는 과로사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지만, 노조 쪽에서 노동 강도 강화의 객관적 수치로 활용하기에는 여러 한계를 띤다. 노조 쪽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에 견줘 ‘사람이 줄고,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시각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용자 쪽을 대변하는 은행연합회의 공성길 팀장도 “노조의 요구나 생각에 꼭 동의한다는 건 아니”라면서도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근무시간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김재현 금융노조 정책본부장은 “한때 14만 명이었던 정규직 조합원이 8만 명으로 떨어진 게 단적인 예”라고 했다. 나머지는 줄어들거나 비정규직으로 채워져 정규직의 노동 강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금융노조의 올 임·단협 요구안 중에서 창구 영업시간 단축은 어쩌면 곁가지일 뿐이다. 요구안 중에는 △사용자 단체 구성을 통한 교섭체제 안정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년 연장(58살 → 60살)도 있다. 창구 영업시간 단축은 18개 요구 항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게 금융노조 쪽 설명이다. 그런데도 창구 마감 시각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고객과 맞닿는 접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고객 불편을 볼모로 삼는다’는 비난을 산 대목이다. 은행별로 조 단위에 이르는 막대한 순이익의 40%가량이 고객 수수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공적자금으로 회생했으면서도 사회적 책임보다는 국내외 주주와 임직원 챙기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나쁜 이미지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배규식 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은행의 노동 시간이 생각보다 길고, 과로사도 꽤 있다”면서도 “오후 3시 반까지만 창구 업무를 하겠다는 건 욕먹기 딱 좋다”고 꼬집었다. “배경은 이해할 수 있지만, 고객 서비스 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해 (창구 영업시간보다는) 오후 4시 반 이후 이뤄지는 장시간 근무를 줄이는 방안을 핵심으로 내놓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노조에서 전체 노동시간을 정상화하는 내용을 내놓지 않은 건 아니지만, 창구 영업시간을 꺼내는 순간 묻힌다는 점을 고려했어야 한다는 충고로 읽힌다.
정서적 반발 고려했어야
금융권 일각에는 노조 쪽에서 금융권의 노동 강도 실상을 알리기 위한 실마리로 삼으려고 반발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부러 꺼냈다는 해석도 있지만, 지혜로운 전략·전술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금융노조의 요구안은 석 달쯤 뒤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노사 타협안에서 은행의 공공성,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 고객 편의성을 어떻게 담보했는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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