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보험은 인류가 발명해낸 상품 가운데 최고의 히트상품이라고 한다. 특히 한국은 민간 보험시장이 대단히 발달한 나라다. 국민총생산에서 민간 생명보험료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4위다. 민간 생명보험에 가입한 가구가 88%에 이르고, 가구당 가입건수도 3.3건(가구당 월평균 보험료 28만원)에 달한다.
민간보험은 크게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으로 구분되지만, 2001년부터 ‘제3의 민간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 민간 의료보험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의 표본 조사에서 민간 의료보험 가입률(개인)은 2005년에 53.1%(특약 형태 가입은 제외), 민간 의료보험 월평균 보험료는 9만3천원으로 나타났다. 민간 의료보험의 보험료 수입은 지난해 10조7천억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손해보험업계는 국내 민간 의료보험 가입자를 1200만 명으로 밝히고 있다.
비급여 항목 보장만 허용하는 방향민간 의료보험은 기존 보험에 ‘진료비 보장’을 특별약관으로 끼워넣은 유형(특약 형태)도 있고, ‘○○건강보험’ 같은 단독 상품도 있다. 민간 의료보험은 크게 정액형과 실손보상형(이하 실손형)으로 나뉜다. 정액형은 가입자가 실제로 지출한 의료비용과 상관없이 계약 당시에 약정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고, 실손형은 치료에 든 실비 기준으로 전액 혹은 일정 비율을 지급해주는 상품이다. 정액형은 생보사를 중심으로 판매하고 있는데 2003년에 전체 민간 의료보험 상품의 85%에 달한다. 나머지 15%(보험료 수입으로 보면 연간 1조6천억원 정도)가 실손형인 셈인데, 실손형은 국민건강보험의 급여 항목 중 ‘법정 본인부담금’, ‘비급여’ 항목의 진료비,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차액의 상당 부분을 보장하는 것으로 설계돼 있다.
그런데 실손형 상품의 보장 영역을 둘러싸고 정부와 보험업계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 10월24일 정부와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의료제도 개선 방안으로 △법정 본인부담금에 대한 민간보험의 보장 제한 △비급여 중심의 실손형 민간 의료보험 제도 활성화 △민간 의료보험 상품 표준화 등을 내놓았다. 건강보험의 법정 본인부담금(급여 항목)은 보장할 수 없도록 하고, ‘비급여’ 항목 진료비 보장만 허용하는 방향으로 현행 민간 의료보험 상품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다만, 민간 의료보험 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신규 출시 실손형 보험상품과 계약 갱신 보험상품에 한정하고, 충분한 유예기간을 두고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험업계는 “정부가 민간 의료보험의 보장 영역을 축소시켜 보험업계를 붕괴시키려 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와 업계가 갈등을 빚고 있는 핵심 쟁점은 법정 본인부담금이다. 정부가, 민간 의료보험 상품이 가입자들에게 보장해주고 있는 법정 본인부담금을 앞으로는 보장할 수 없도록 제한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법정 본인부담금까지 민간 의료보험이 지급해주면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남용을 초래하고, 의료비 급증에 따라 건강보험 재정 안정성이 크게 위협받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실손형 상품이 법정 본인부담금을 보장해줌으로써 건강보험 부담금이 최소 2400억원에서 최대 1조7천억원(보험료의 1.5∼10.6%)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대해 보험업계는 “정부의 추정치는 신뢰할 수 없다. 건강보험 재정 악화는 민영 의료보험 탓이 아니고, 국민 소득수준 증가에 의한 것이다. 민영 의료보험은 국민들의 의료 접근성을 높여 중증 질병 발생을 미연에 막는 효과가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민영 의료보험이 본인부담금의 전액 또는 일부를 보장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민간 의료보험에 본인부담금까지 보장하면 과잉 의료 이용이 나타나고, 건강보험의 의료비 부담이 증가한다는 건 정도의 문제일 뿐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다.
의료비 부담 항목을 따져보면, 총 진료비가 100원일 때 건강보험 급여항목은 80원 안팎(건강보험에서 60원 정도 지급, 본인부담금 20원 정도)이고, 비급여(고가 의료기 이용 등) 항목이 20원가량이다. 즉, ‘60:20:20’ 구조이고, 40(본인부담금 20+비급여 20)이 현재 민간 의료보험이 보장해주고 있는 영역이다. 급여 항목 진료비 중에서 본인부담금은 나이·질병·치료술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개 외래는 최대 30%, 입원은 최대 20% 정도다. 그런데 병원 식대와 상급병실료 차액이 급여화되고, 만 6살 이하 입원진료의 본인부담금이 면제되는 등 법정 본인부담금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정부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현재 60%대에서 75%까지 올려나갈 방침이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로드맵은 실손형 상품의 본인부담금 보장과 충돌하게 된다. 왜 그럴까?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용갑 연구위원은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를 위해 보험료를 6.5% 올려 1인당 3천원 정도 더 내야 한다고 국민들을 설득한다고 하자. 그런데 ‘나는 ○○화재보험의 실손형 상품에 가입해서 본인부담금까지 다 돌려받고 있는데, 내가 왜 3천원을 더 내야 하느냐?’는 반발이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 의료보험을 죽이자는 것도 아닌데…보험사들은 특히 본인부담금을 보장 대상에서 제외하면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이 가중된다고 주장한다. 보험개발원은 “저소득층을 포함한 중간소득 계층 상당수가 실손형 상품에 가입하고 있는데, 이는 본인부담금 위험을 회피하려는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본인부담금 보장을 금지하면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의료 이용의 양극화를 유발하게 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이용갑 연구위원은 “보험업계가 1200만 명이나 가입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손형 상품을 보면 공기업·대기업이 노사협약을 맺어 복리후생으로 단체 가입한 것이 3분의 2를 넘고 개인 가입은 많지 않다. 또 세대당 국민건강보험 보험료 5만원도 내기 어려운 저소득층 사람들이 어떻게 1인당 5만∼7만원의 민간 의료보험 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가? 저소득층 운운하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손해보험협회 박종화 부장은 “솔직히 말해 실손형 상품 가입자들은 병원에 낸 의료비를 다 돌려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본인부담금을 빼버리면 가입자를 끌어모으기 어렵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법정 본인부담금은 과잉 의료를 막기 위해 정부가 정책수단으로 설정해놓은 최소한의 ‘경제적 장벽’이다. 보건복지부 보험정책팀은 “치료라기보다는 사실상 미용·성형 수술에 가까운 요실금 수술의 경우 의료비가 해마다 2∼3배씩 증가하고 있다. 수술비가 500만원인데 건강보험에서 40만원이 지급되고, 나머지 본인부담금 460만원을 민영 의료보험이 지급하기 때문에 과잉 시술이 일어나고 있는 사례다. 의료를 많이 이용한다고 해서 건강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최소한의 본인부담금은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 의료보험이 법정 본인부담금까지 보장하면서 건강보험의 정책수단을 허물고 있다는 얘기다. 현행 실손형 상품은 입원의 경우, 대체로 법정 본인부담금의 70%까지 실비로 보장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결국 법정 본인부담금 보장을 둘러싼 대립은 국민건강보험을 지키면서 동시에 건강보험과 민간 의료보험의 역할(또는 경쟁체제)을 적절하게 설정하는 문제다. 사회보험인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려는 정부와 민간 의료보험을 확대하려는 업계 간의 충돌 양상인 것이다. 손해보험협회 쪽은 “건강보험 재정이 나빠지면서 보험료가 계속 인상되고 있다. 건강보험은 본인이 15만원을 낸다면 회사가 15만원을 부담해 총 30만원을 내는 셈인데, 건강보험은 엄청나게 비싼 편”이라고 정면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용갑 연구위원은 “국민 의료복지를 위해서는 일단 건강보험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간 의료보험을 죽이자는 것도 아니다. 법정 본인부담금을 민간 의료보험에서 제외하더라도 암 등 고액 중증 질환이나 상급병실비, 간병비, 치과, 미용·성형 등 ‘비급여’ 항목에서 민간 의료보험이 활성화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연간 국민 의료비 지출 43조원 중에서 50% 정도가 비급여이므로 민간 보험사가 충분히 의료보험 상품을 개발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첨단 의료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도민간보험 상품이 본인부담금 보장은 빼고 비급여 중심으로 설계되면 △첨단 의료기술 발전 △저소득층을 위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촉진 △의료 양극화 완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예컨대 비급여 대상인 양전자단층촬영(PET)의 경우 민간 의료보험이 진료비를 보장해주면 사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단가가 낮아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이제 건강보험에서 급여 적용을 해줄 수 있게 된다. 급여가 적용되면 PET는 민간 의료보험 지급 대상에서 빠지고, 민간 의료보험은 또 다른 신의료기술의 치료비 보장으로 상품을 바꾸게 된다. 민간 의료보험이 공보험의 공백(비급여 항목)을 보완하면서 건강보험과 민간보험이 상생하는 모델이다.
민간 의료보험은 보험상품 중에서 가장 설계가 복잡하고 전문적인 축에 속한다. 수백 종의 상품이 난립하면서 보장 내용과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아무리 뜯어봐도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상품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실손형 상품이라도 가입자가 실제로 지출한 진료비를 모두 지급받는 것도 아니다. 충북대 의대 이진석 교수는 “실손형 상품을 뜯어보면, 뇌졸중을 보장하는 것처럼 광고하면서 전체 뇌졸중의 25%에 해당하는 뇌출혈만을 보장하거나, 보험을 계약한 지 1∼2년 이내에 발병하면 계약 보험금을 절반 혹은 10%만 지급하는 등 보장성이 취약하다”며 “보험협회에서 상품 비교 공시도 제대로 안 돼 각 사의 상품 가격과 질을 비교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소비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위해 민간보험 상품의 표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은 보건의료시민단체와 공동으로 민간 의료보험 상품의 표준화와 본인부담금 보장 제외를 뼈대로 한 ‘민영의료보험법’ 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민간 의료보험 시장을 혁신하기 위한 제도적 규제가 본격화하면서 보건당국과 보험업계의 갈등은 첨예화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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