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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명령, 아메리칸 스탠더드!

등록 2006-07-27 00:00 수정 2020-05-03 04:24

아시아적 가치를 위기 원흉으로 몰고 잔인한 구조조정을 강요한 IMF 후 9년…사회가 투명하고 공정해지기도 했으나 87년 민주주의 체제는 후퇴하고 말았네

표지 한미 FTA와 IMF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누가 뭐래도 1997년은 혼돈의 시기였다. 그해 겨울, 갑작스레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 대가로 우리는 그들이 강요한 엄혹한 구조조정 계획을 받아들여야 했다. 언론들은 “왜 위기가 닥칠 것을 몰랐냐”고 정부를 질타했지만, 화풀이와 책임 전가로 발등에 떨어지는 불을 끌 순 없는 노릇이다.

위기를 알지 못한 것은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1월7일 현대그룹 산하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한국의 경제 상황이 94년 외환위기를 겪은 멕시코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외환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를 모았지만, 그들도 1997년과 같은 거대한 ‘쓰나미’가 아시아를 덮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한국 경제가 안고 있던 수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종의 ‘교통사고’가 아니었나 싶다.

‘물리적 법칙’이자 ‘윤리적 당위’가 되다

IMF와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위기의 원인은 단순 명료했다. 9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경제 성장의 기적으로 꼽혔던 ‘아시아적 가치’들이 하루아침에 위기를 몰고 온 원흉으로 돌변했다. 한국의 주류 언론들이 접한 위기에 대한 첫 분석은 영국의 경제 주간지 1998년 1월10일치에 소개된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논문(‘What happened to Asia’)이었다. 크루그먼은 “정부가 투자를 보장하는 은행들의 무모하고 투기적인 투자”를 위기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들의 눈에 ‘관치’로 상징되는 한국의 금융시장은 후진적이었고, 재벌의 부채 비율은 지나치게 높았으며,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었다. 아시아 경제 위기의 원인은 아시아 내부에 있었다. IMF는 한국 사회에 잔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구조조정 정책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고, 우린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홍기빈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는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글로벌 스탠더드, 좀더 정확히 말해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게 됐다”고 말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는 ‘물리적 법칙’으로, 또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윤리적 당위’로 여겨졌다.

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는 1997년 12월3일치 사설 ‘쓰다고 다 좋은 약 아니다’에서 “IMF 협의단은 자금지원 조건으로 대폭적인 금융산업 개편과 개방, 산업구조 조정과 강도 높은 긴축정책 실천을 강력히 요구했다”며 “IMF와의 인식이나 정보의 차이 또는 특정국의 이해에 치우친 일방적 강요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득과 함께 분명한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미국의 경제학자 마틴 펠드스테인 하버드대 교수는 1998년 3~4월치 에 쓴 글(‘Refocusing the IMF’)에서 IMF의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한국의 현 경제구조는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발전 단계와 근면·자기희생·충성심·노동자연대를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에 아주 적합한 것일 수 있다. 노동·상품·자본시장을 미국식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충격을 주지 않고 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통화위기 와중에 이를 시도하는 것은 타이밍이 매우 좋지 않다.”

그렇지만 채 열흘이 못 돼 는 말을 바꾸고 만다. 이 신문은 1997년 12월11일치 사설 ‘불신 심화시킨 재협상론’에서 “한 야당 대선후보(김대중 전 대통령)가 제기한 이 재협상론은 IMF 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외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한국 정부가 구조개혁을 신속하고 완전하게 실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빠지게 했다”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에 대해 약속을 지키고 구조개혁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신문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는 장 미셸 캉드시 당시 IMF 총재의 말을 빌려 “IMF 재협상 요구 금융공황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고, 는 “정치권 IMF 재협상 요구, 신뢰감 추락 외화난 가중”한다고 주장했다. 잠시 동안의 혼란 끝에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정책은 한국 사회가 따라야 할 금과옥조가 됐고, 그 정책을 집행한 사람들은 ‘이헌재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어나갈 메인 스트림이 됐다.

양극화, 현실 도피, 한탕주의, 복고주의…

IMF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바꾸어버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IMF 사태가 터진 뒤 5개월이 지나고(1998년 4월29일) 발표한 보고서(‘IMF 이후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서 IMF 사태 이후 바뀐 한국인들의 삶의 모습 10가지를 개념화했다. 첫째, 평생 직장으로 상징되던 한국의 기업 문화가 해체되고 말았다. 직장은 더 이상 한 사람의 평생을 보장해줄 따뜻하고 안온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후 이직과 헤드헌팅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됐고, 젊은이들은 더 높은 연봉을 좇아 늘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게 됐다.

둘째, 아메리칸 스탠더드라고 불러야 더 적합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사람들은 경제·사회 제도뿐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도 미국의 것을 좇게 됐다. 미국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드라마 등이 유행했고, 드라마에서 나온 문화 코드들인 요가, 하이힐, 브런치 등도 인기를 모았다.

셋째, ‘양극화’로 인한 계층 갈등이 커졌고, 그로 인해 귀농·이민·명상·심리상담 등에 귀의하는 ‘현실 도피’(4번째)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로또’로 대표되는 ‘한탕주의’(5번째)가 기승을 부렸는가 하면, ‘금 모으기 운동’과 이후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애국주의 열풍’(6번째)도 본격화됐다. 정·의리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제 우선 마인드’(7번째)가 뿌리내렸고, 그에 맞게 사회가 ‘투명하고 공정’(8번째)해진 것도 사실이다. 빠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따뜻함을 추구’(9번째)하는 사람들이 늘었는가 하면, 앞만 보고 달려온 30년 경제 성장을 뒤돌아보는 ‘복고주의 열풍’(10번째)이 불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민주주의의 후퇴다. 마틴 펠드스테인은 기고문에서 IMF 정책이 주권 국가의 민주적 정치 과정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IMF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한국외국어대에서 3년째 교직원으로 일하는 이소영(30)씨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정부가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3개월째로 접어든 외국어대 파업 집회 때문에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동료들과 얘기할 시간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FTA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냥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언론 보도 등을 통해 FTA 이후 벌어질 사회적 충격을 흡수할 만한 준비가 안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는 (파업 탓도 있고 해서) 요즘 기회가 될 때마다 FTA 반대 집회장에 나간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회 참가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외친다고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정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그는 “FTA도 무섭지만, 우리의 참여가 정부를 바꾸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그들이 저항이 ‘사악’하기까지 한가

한미 FTA 앞에서 한국 사회는 둘로 갈라져 있다. 7월10일 문화방송 에서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미 FTA 체결 반대’가 45.4%, ‘찬성’이 42.6%로 팽팽히 맞서 있다. 그러나 졸속으로 진행되는 한미 FTA와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회적 충격을 걱정하는 노동자·농민들의 저항에 대해 ‘땅 투기보다 사악한 지대 추구’( 7월17일치 칼럼) 행위로 명명한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글에서는 각자가 지닌 정치적 지향을 따라 문자 그대로 할 말을 잃게 된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과격하다’ 주장할 순 있지만, ‘사악하다’ 말할 순 없다. 이는 보수 신문들이 자주 우려먹는 레퍼토리대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읽히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미 무감각해진 것처럼 보인다. IMF부터 한미 FTA까지, 지난 9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퇴행해왔나 보다.



FTA 찬성에도 미묘한 온도 차




는 ‘정권 친위세력’ 한탄, 는 ‘밀어붙여라’

한미 FTA를 바라보는 보수 언론의 시각은 어떨까. 조??동은 한미 FTA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원론에는 찬성이지만, 사회적 합의나 제대로 된 준비 없는 협상에는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한미 FTA의 문제점을 집중 부각한 나 과 달리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협상 과정을 단순 중계하는 데 그쳤다. 이는 미국에서 열린 1차 협상 기간 동안 한미 FTA에 대한 보도가 (17건>과 (14건)에 견줘 절반 수준에 머무른 데서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미묘한 온도 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7월14일 발표한 ‘10~13일 한미 FTA 관련 조선?중?동아일보 보도에 대한 논평’을 보면 “와 가 ‘FTA 체결이 순조롭지 않은 상황’을 문제 삼아 ‘반대세력과 국민을 잘 설득해 FTA 체결하라’는 논리로 정부를 압박했다면 는 좀더 노골적으로 ‘한미 FTA를 체결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주장을 폈다”고 적었다.
이를테면 가 ‘정권 친위세력이 FTA 반대에 앞장서니’(7월10일 사설)에서 “밖에서는 협상력에 꿀리고, 안으로는 정권의 지지세력들이 협상 테이블을 뒤엎는 상황에서 일이 어떻게 돼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한탄한 데 견줘, 는 같은 날 사설에서 “무역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에서 FTA를 통한 미국시장 개척은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의 필수적인 전략”이라며 한미 FTA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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