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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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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氣uP!] 휴대폰 든 ‘호모 루덴스’를 향하여

등록 2005-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기업, 氣uP! | 나스카(주)]

오성민 사장이 직원 월급도 밀렸던 모바일 게임업체 ‘나스카’를 시장의 강자로 만들기까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남아메리카 페루 남서부의 도시 나스카(Nazca)는 땅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나스카 라인’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직선, 곡선, 삼각형, 사다리꼴, 거대한 동물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길이 120m에 이르는 새 그림은 비행기에서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다. 그려진 시기는 기원전 1000년께로 추정되며, 천체 관측과 점성술과 관련돼 있다고 추정될 뿐 아직 그림의 뜻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수억원 손해 입고 증권회사 떠나다

오성민(39) 사장이 옛 회사(외환위기 뒤 문을 닫은 고려증권) 후배와 함께 모바일 게임 업체를 차리면서 이름을 ‘나스카’로 삼은 것은 페루 평원에 있는 나스카 라인의 독창성을 지향한다는 뜻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6월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때만 해도 오 사장은 나스카의 경영에 전적으로 나선 게 아니었다. 다니던 고려증권을 떠나 통신 단말기(호출기, 휴대폰) 판매 업체인 해오름텔레콤을 설립해 운영 중이었기 때문에 나스카에는 2대 주주로만 참여했을 뿐 경영에 나설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외환위기 1년 전인 1996년 말. 당시 고려증권에 다니고 있던 오 사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가 투자한 한보철강이 부도설에 휩쓸리며 주가가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돈까지 끌어모아 신용으로 사들인 한보철강 주식은 무려 5만주, 약 5억원어치였다. 증권사 직원은 원칙적으로 직접 주식에 투자할 수 없도록 돼 있었음에도 대부분 차명으로 하던 때였다. 한때 주당 1만3천원까지 올랐던 한보철강 주가는 나날이 떨어졌다.

한보철강은 얼마 못 가 결국 부도에 이르렀고, 오 사장은 수억원의 손해를 입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주당 5천원 수준에서 물량을 털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보철강 주식을 매입했다 입은 손실을 막기 위해 오 사장은 경기도 과천의 아파트를 팔았고, 급기야 회사를 떠나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됐다.

증권사를 떠나 1997년에 설립한 해오름텔레콤은 그럭저럭 장사가 잘됐다. “휴대폰 가입자가 200만명이던 시절이었거든요. 휴대폰을 중심으로 이동통신 단말기 시장이 막 성장세를 탈 무렵이었습니다.” 오 사장은 통신 단말기 사업의 호조 덕에 그동안의 손실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새 일을 도모하자’며 오 사장과 같이 회사를 떠난 후배는 개인용 컴퓨터(PC) 게임 소프트웨어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는 몇년 뒤 오 사장의 인생 항로가 또 한번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됐다. 나스카라는 법인은 후배의 개인 사업체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나스카는 설립 초기 무선·온라인 게임 사업부와 함께 음반기획 사업부까지 두고 있었는데, 음반기획 부문의 부진으로 회사는 경영난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표를 맡고 있던 오 사장의 후배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3월이었다. 오 사장이 나스카 경영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사고 탓이었다. 나스카 경영을 맡게 되면서 오 사장은 해오름텔레콤의 사업권은 다른 데로 넘겼다.

귀동냥으로 업무를 익혀가며

“그때는 참 막막했습니다. 회사 형편을 들여다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직원들 밀린 급여가 무려 4억원이었습니다. 자본금도 거의 다 까먹은 상태였고….”

그런 처지에 빠진 회사를 굳이 힘들게 맡았던 이유가 궁금했다.

“몇달 동안 월급을 못 받는 와중에도 직원 12명이 남아 있었는데, 열의를 갖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 사람들이 버텨준 게 큰 힘이 됐습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그동안 쌓은 회사의 ‘업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도 들었습니다. 1999년 설립해 2002년까지 운영하면서 회사 나름대로 쌓아놓은 경험을 살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요.”‘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판단과 달리 곤경에 빠진 회사를 추스르는 건 쉽지 않았다. 문과(서강대 경제학과) 출신인 오 사장에게 모바일 게임사업은 너무 낯설었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직원들과 부대끼고, 같은 업종의 경영자들을 만나 귀동냥으로 업무를 하나하나 익혀갔다. 회사 일과 업계 사정을 배우는 과정에서 ‘술’은 아주 좋은 매개체였다. 모바일 게임 업체 사장치고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30대 후반(당시 36살)에 이른 사실도 업계에서 발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오 사장은 회사 일을 익혀나가는 한편으로 무선게임 사업부를 확대하고 나머지 사업은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성장 잠재력을 갖춘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판단에서였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결과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한해 3억~4억원에 머물던 매출이 회사를 맡은 첫해 7억원으로 두배가량 높아졌다. 이즈음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1억8천만원의 융자를 받아 자금 흐름에서도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나스카의 한해 매출은 이제 20억원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500개 안팎의 업체들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모바일 게임업계에서 10위권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임직원 수가 23명에 이르는 것을 감안할 때 과히 많지 않은 매출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인건비외 비용이 거의 없어 흑자(당기순이익)를 거두고 있다고 오 사장은 밝힌다. 올해 직원을 더 뽑아 30명까지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이런 바탕에서다. 오 사장의 설명대로 “이제 회사의 골격은 갖춘 셈”이다.

오 사장에 얽힌 일화를 전해들으며 드는 느낌은, 그가 사람에게 모질지 못하고 일에는 철저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오 사장은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이 있다. 서울 합정동 로터리에서 양화대교 방향으로 가고 있던 그의 자동차 뒤편을 대형 트레일러가 차선을 바꾸며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빙글빙글 돌며 30m 이상 끌려갔다. 수리비 견적이 600만원에 이를 정도로 차가 크게 부서졌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보험사 직원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만 찍으면 100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지만, 그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병원은 무슨…” 하면서 돌아섰다.

업체들 묶어 이동통신 회사와 대화해야

이와 달리 한번 맡은 일을 대충 넘기지 못하는 성정은 회사 경영뿐 아니라 모바일게임협 회장직 수행에서도 잘 드러났다. 오 사장이 협회장을 맡은 지난해 3월 당시 20개에 지나지 않던 협회 회원사가 80개로 불어났다. 이들 80개사가 전체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80%에 이르기 때문에 업계의 대표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과는 오 사장의 활발한 대외활동에 힘입은 바 컸다. 협회가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바뀌어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큰 결실로 꼽힌다.

협회장을 맡아 대외활동에 치중하면 회사 경영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게임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 제가 참여하려 들면 간섭으로 비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잘 알지도 못하니 믿고 맡기는 거죠. 회사 일에 일일이 끼어들기보다는 바깥으로 만남의 폭을 넓히면서 파악한 시장 흐름과 정보를 전해주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이와 함께 협회를 중심으로 업체들을 묶어냄으로써 (모바일 게임의 유통경로인) 이동통신 회사의 대화 상대로 인정받는 과제도 회사 경영을 위해 절실하다는 게 오 사장의 판단이다. 이동통신 회사와 모바일 게임 업체의 극도의 불균형적 주종관계에선 게임의 콘텐츠(내용물) 경쟁보다는 비정상적인 마케팅 싸움이 횡행하게 되기 때문에 협회를 통해 업계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 사장의 나스카는 현재 국내 3대 이동통신사와 유럽 17개국에 다양한 게임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으며, 올 하반기부터는 네트워크 게임(사람끼리 하는)을 선보일 방침이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만족을 꾀한다는 회사의 모토를 달성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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