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업, 氣uP!] 주인이 사원으로, 사원이 주인으로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업, 氣uP! | 신원]

창업자의 사재 출연과 사원들의 주식매입으로 회생한 (주)신원, 개성공단에서 도약의 발판 마련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 개성공업지구. 흔히 개성공단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황우승 부장을 비롯한 (주)신원 직원 7명이 파견돼 있다. 지난 12월10일 휴전선을 넘은 이들 직원은 새해 1월 정식 가동에 들어갈 (주)신원 개성공장(법인명 개성신원에벤에셀)에서 일할 300명의 북한 직원을 뽑는 등 공장 가동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과욕’이 부메랑으로

의류업체 (주)신원에 개성신원에벤에셀은 청도신원(중국), P·T신원(인도네시아), 신원베트남, 신원과테말라에 이은 또 하나의 해외 공장이란 뜻에만 머물지 않는다. 외환위기로 고된 시련을 겪은 뒤 몸피를 가볍게 함으로써 생존의 바탕을 마련한 회사가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이 회사는 개성공장에서 여성복 브랜드인 ‘베스띠벨리’를 비롯한 4개 브랜드를 한해 25만벌가량 생산해 국내로 들여올 계획이다. 이는 (주)신원 전체 내수 물량의 10~15% 수준으로, 이에 따른 한해 원가 절감 규모가 15억원에 이를 것으로 회사쪽은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의 특별이익이 해마다 생기는 셈이라고 박흥식 부사장은 말했다.

외환위기 뒤 몸집을 줄이기만 하다가 이번 개성공장 설립을 계기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경영으로 돌아서는 배경에는 그동안 다진 내실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이 회사는 2004년 들어 9월 말까지 2747억원의 매출에 4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지난 한해 매출액이 3815억원, 당기순이익이 41억원이었던 것에 견줘 성장세보다는 내실이 돋보인다. 2002년에는 매출 4427억원에 1081억원의 적자(당기순손실)를 기록한 바 있다.

1997년만 하더라도 (주)신원은 국내 계열사 16개, 해외 계열사 8개사를 거느린 중견 기업이었다. 90년대 초반 투자금융회사와 종합금융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돈을 꾸기가 쉬웠던 외부 환경과 사업 확장에 대한 의욕이 겹친 결과였다. 섬유로 시작한 기업이 전자, 건설, 골프장 등 갖가지 계열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들인 차입금은 외환위기와 함께 맹렬한 타격을 가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800원대의 환율이 1600원대로 급등하고, 12% 수준이던 이자율이 40%까지 치솟아 빚은 두배, 세배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재고 누적으로 제품값이 떨어지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 1998년 한해 적자 규모가 5천억원을 웃돌았던 데서 당시의 경영난을 짐작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회사는 결국 1998년 7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구성원들의 주인의식 크게 높아져

워크아웃 개시 뒤 5년 만인 2003년 5월 최종 졸업하기까지 회사가 겪은 숱한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유구조의 지각변동이었다. 워크아웃 이전인 97년에는 창업자인 박성철 회장이 22.6%의 지분을 확보한 최대주주였지만, 이젠 우리사주조합이 12.1%의 지분을 가진 1대주주로 올라 있다. 오너(대주주)가 월급쟁이 회장이 되고, 월급쟁이인 직원들이 오너가 되는 ‘거꾸로 처지’가 된 셈이다. 이는 1998년부터 99년 상반기에 걸쳐 박 회장이 경영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주식 전액을 비롯해 180억원어치(평가액)의 개인 재산을 회사에 무상으로 내놓은 데서 비롯됐다. 당시 박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던 박흥식 부사장은 “(서울 아현동에 있는) 집까지 무상증여 대상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이미 담보로 잡혀 있는데 뭘 그러냐’며 은행에서 되레 만류해 그대로 뒀다”고 전했다.

“그때 회장님은 ‘신원이란 회사 이름만 영원히 남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시더라. 독실한 기독교인에 청교도적 가치관을 지니신 그분은 평소부터 ‘죽을 때는 수의 한벌 입고 갈 뿐’이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 사재 출연하겠다고 한 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들 셋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거나 다른 데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유학 중이며, 회사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

최고경영자의 기득권(대주주 자격) 포기는 채권단과 벌인 부채 협상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촉진제였을 뿐 아니라 그 뒤 이어진 구조조정에 힘을 실어줬다. 대주주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에서도 박 회장은 경영권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덩치 줄이기를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이에 따라 본업인 섬유 외의 계열사는 모두 정리되고 한때 13개나 되던 의류 브랜드는 5개로 줄었다. 1700명에 이르던 직원 가운데 1천명이 회사를 떠나는 아픔도 맛봐야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회사의 내실은 비교적 탄탄해졌다.

(주)신원은 워크아웃을 졸업하기 훨씬 이전인 2001년 9월 워크아웃 자율추진 기업으로 지정돼 채권단관리 체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사실상 이때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워크아웃 돌입 뒤 신속한 구조조정에 따라 2000년부터 흑자(14억원) 기조를 굳히는 등 정상 궤도에 오른 데 힘입은 것이었다. 회사는 이 과정에서 부채 출자전환 혜택을 입었을 뿐 부채 탕감을 한푼도 받지 않음으로써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다.

최대주주 자리가 박 회장에게서 채권단을 거쳐 다시 우리사주조합으로 넘어가는 질적 변화를 겪은 시점은 2003년 5월 워크아웃 종료 때였다. 부채 출자전환을 통해 주식을 보유한 채권단 지분이 이때 대거 직원들 손으로 옮아간 것이다.

개성은 섬유 수입쿼터제 폐지의 활로

이는 소유구조의 변화에서 나아가 기업 문화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됐다. 미래가치가 불확실환 회사 주식을 너도나도 인수하면서 회사 앞날에 대한 낙관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주인 의식을 크게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경하 이사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회사가 또다시 위험해질 수 있다는 주인 의식이 강해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옛날 같으면 은행 빚이 얼마나 많은지, 회사의 이념이나 정책은 어떤지 직원들이 잘 몰랐는데 지금은 마인드가 바뀌었다. 자발적으로 출근 시간을 앞당기고, 영업실적이 크게 개선된 것도 그런 덕분인 듯하다.”

박흥식 부사장은 “직원들의 인생과 회사의 운명이 하나라는 일체감이 강해졌다”며 “예전 같으면 경기 탓을 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어려워도 변명할 수 없고 스스로 부딪치고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신원이 한때 겪었던 어려움에서 빠져나와 다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결실을 거두고 있지만, 앞날이 탄탄대로일 것이라는 낙관은 아직 금물이다. 섬유업의 성장세가 약한데다 새해 1월1일부터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터키 등 4개국이 섬유 수입쿼터제를 폐지함에 따라 어려움을 가중하고 있다. 섬유쿼터제는 수출입국이 매년 협상을 통해 일정량의 수출한도를 설정하는 제도로,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중국, 인도 등 저임금 국가들과 무한 가격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신원의 개성공장 설립은 이런 어려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유력한 활로로 여겨진다. 개성공단은 남한까지 육로로 1시간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중국 현지 생산에 견줘 물류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다. 또 북한 직원의 인건비가 월 57.5달러(6만원 수준)로 대단히 싼 편이다. 여기에 중국과 달리 언어가 자유롭게 소통된다는 이점이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남북 관계가 싸늘해지는 일만 없다면, 또 한번의 큰 기회를 맞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만하다. (주)신원으로선 남북 화해 무드에 앞날을 건 셈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