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모리스가 서울대 등에 10억원 연구비 용역… 시민사회와 함께 공익 연구를 고민해야 할 때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7월 초 언론에는 다국적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와 관련된 놀라운 기사가 두 가지 실렸다. 하나는 이 회사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저개발국의 어린이와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판촉 활동을 벌인 혐의로 나이지리아의 4개 주 정부로부터 흡연으로 인한 질병 치료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는 영국 지의 보도이다.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BAT)와 필립모리스 인터내셔널 현지 법인들은 선진국의 흡연층이 줄어드는 데 비해 젊은 층의 흡연 인구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후진국 지역에서 자신들의 담배 맛에 길들여진 흡연층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음악 콘서트와 스포츠 행사를 후원하고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담배를 나눠주었다는 것이다.
2001년 릴란데르 교수 사건
비슷한 시기에 터져나온 또 하나의 기사는 부끄럽게도 서울대, 전남대, 가톨릭대 임상시험 센터가 필립모리스가 제공하는 10억원의 연구비 용역으로 담배의 유해성 평가를 위한 임상시험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금연운동협의회가 문제를 삼으면서 비로소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 유수 대학들은 지난 7월5일 금연운동협의회가 연구계약의 윤리성을 지적하고 연구 철회를 주장할 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울대병원 윤리심의위원회는 학계와 시민단체들에서 “국민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병원의 연구로 부적절하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12일에야 연구 승인을 취소했다.
다른 담배회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필립모리스는 돈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사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50여 년 동안 담배의 유해성을 속인 대가로 미국의 40여 개 주에서 2천억달러 이상을 보상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뒤 담배회사들은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담배회사들은 틈만 나면 위험성 주장에 다른 원인을 끌어대 물타기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 한 예로 2001년 스위스 제네바대학의 라그나르 릴란데르 교수는 필립모리스의 자금을 받은 연구에서 간접흡연의 피해가 과장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제네바의 금연단체들이 그를 고소했고, 결국 릴란데르 교수는 유럽연합의 건강·환경 분야 전문위원직을 박탈당했다. 또한 1998년 우리나라에서 실내공기 오염 전공 교수 3명이 필립모리스의 지원을 받은 연구로 당시 한창 사회문제가 되던 간접흡연에 대한 위험을 라돈 등 다른 위해 요소로 전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익을 위해 임산부와 어린이의 건강을 아랑곳하지 않는 다국적 담배회사의 탐욕에 맞서는 싸움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순간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 의대는 의도가 농후한 돈으로 연구에 착수했고, 연구책임자인 서울대 의대 교수는 문제의 연구가 덜 해로운 담배를 만드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 해로울 게 없고 관심 없는 연구도 아닌데 서울대병원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고리대부업 광고에 나섰다가 비난을 받고 사과하는 연예인들은 정말 양식 있는 공인인 셈이다.
과학연구에서 학문적인 과학자,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연구해야 하는 대학이나 공적 기관에 속한 연구자들이 기업의 지원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빚는 이해갈등(conflict of interest)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많은 과학사회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과학이 급속히 상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공익 과학의 개념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가 경제 제일주의와 무한경쟁 체계로 돌입하면서 과학은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간주됐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산학협력이라는 제도는 대학의 과학자들에게 상업적 가치가 있는 연구를 부추기고, 과학자-기업가로 변신할 것을 촉구했다.
유럽, 건강한 아카데미즘을 회복하자
유럽과 미국에서는 과학의 상업화와 그로 인한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됐다. 특히 의학과 약학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얽힌 연구비를 받는 행위는 자칫 공중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공적 연구기관들은 세심한 윤리 지침을 마련해왔다. 미국의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등 많은 대학들은 담배회사로부터 어떠한 연구비도 받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해갈등에는 기업의 돈을 받고 해당 업체에 유리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뿐 아니라 주요 약품 심사에서 자신이 연구비를 받는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사례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개발된 웨스 레들레 소아백신인 로타쉴드 백신은 1987년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지만 1년 만에 시장에서 회수됐다. 유아와 어린이들에게 심각한 위장병을 일으키는 로타바이러스에 대한 이 백신이 100회 이상의 중증장폐색 증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개혁 하원위원회의 조사 결과 백신 승인 과정에 관여한 위원회가 해당 기업과 연관된 인사들로 온통 채워져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지식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오랜 신념을 간직해온 서구의 과학계는 1980년대 이래 과학의 규범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건강한 아카데미즘과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기와 전쟁을 겪고, 1960년대 경제개발 계획에서 간신히 터전을 마련한 우리의 과학은 경제성장 이외에 다른 목표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다시 말해 회복할 아카데미즘이나 공공성의 경험조차 없는 셈이다.
이번에 발생한 필립모리스와 국립 의대 사건은 우리의 과학이 공익성 측면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부 국립의대의 윤리 불감증으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경제주의를 유일한 가치로 치켜세우고 성과를 챙기는 데 급급할 뿐, 연구가 특정 기업에 이익을 주고 공중에게 큰 위험을 초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뒷전으로 돌리는 정부의 태도도 큰 몫을 했다. 공익성을 대변해야 할 정부가 앞장서서 연구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마당에 국립대학 혼자 독야청청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황우석 사태를 거치고, 몇 달 전 늑대 복제 사건을 겪고서도 여전히 대학의 학문적 과학자들이 연구의 공익성과 연구윤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부나 대학 쪽의 노력이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정부가 앞장서 상업주의 부추겨서야
우리의 과학은 성장주의를 맹신하는 정부, 그리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린이와 임산부까지 희생시키는 기업에 포위돼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서구와 달리 공익성을 우선시하는 전통도 없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지만, 공익 연구는 현장의 뜻있는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전통이다. 서구의 사례가 우리의 노력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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