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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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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프네

등록 2004-10-22 00:00 수정 2020-05-03 04:23

우울증 발병률 정상인보다 높은 내과 환자들… 호르몬 변화 큰 출산 전후 여성 특히 심해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30대 중반의 주부 전아무개씨는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천식이 있어 고생은 했지만 약을 복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3년 전 둘째아이를 출산한 뒤로 증세가 심해져 요즘은 하루에 4번씩 꼬박꼬박 약을 먹어야 숨쉬는 게 편안하다. 외출했을 때 갑작스럽게 증세가 심해지면 분무기로 약물을 빨아들이기도 한다. 그렇게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최근 전씨는 또 하나의 ‘지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바로 우울증이었다. 가끔 짜증이 나고 식욕이 없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우울증의 증세였던 것이다. 지금은 증세가 심각하지 않아 한동안 약물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고혈압·동맥경화 등 순환기 병과 밀접

이렇게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내과 질환으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우울증 발병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는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내과 진료를 받는 환자 1254명을 대상으로 우울증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여기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내과 환자가 전체의 약 43%(남성37%, 여성 62%)로 나타났다. 이는 특별한 신체 질환이 없는 사람들의 우울증 발병률(남성 5∼12%, 여성 10∼25%)보다 최대 6배 이상 높은 수치다. 그동안 국내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30~40%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우울증이 다른 질환과 함께 발병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며 신체 질병과 함께 마음의 병도 함께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질환에 따라 우울증 발병률도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상관성을 보인 환자는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등 순환기 내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순환기 내과 환자들은 무려 54.6%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 다음은 류머티즘 내과(51.5%), 신장 내과(43.4%), 내분비 내과(39.3%), 호흡기 내과(34.3%), 소화기 내과(32.7%) 등의 순이었다. 우울증을 동시에 앓는 환자들은 신체 증상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도 높게 나타났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 김광수 이사장(가톨릭의대 성모병원 정신과 교수)은 “우울증을 동반하는 내과 환자는 신체 증상도 심하고 치료 예후도 나쁘며 평균 진료 일수도 많다. 신체 질환이 있다면 정신과적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의 평균 발병 연령은 40살이고, 50% 이상이 20∼50살 사이에 발병한다. 과거에 우울증은 갱년기·노년기에 주로 나타나고, 그 증상이 주로 의욕상실 등 활동 저하로 국한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젊은층의 알코올이나 약물 남용이 많아지면서 발병률이 연령별로 고른 분포를 보인다. 최근의 우울증 환자들은 공격적인 양태를 보여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들은 특별한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서양인과 달리 한국인은 우울증을 신체적 증상으로 먼저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소화가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두근거리고, 숨이 차고, 변비를 호소하는 우울증 환자가 적지 않다. 오랫동안 억눌린 감정을 감당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빠지다 보니 신체적인 무리가 따르는 까닭이다.

여성들의 우울증 발병률이 남성보다 크게 높은 것은 출산과 폐경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산모 중 많게는 85%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우울증을 경험한다. 대부분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우울증이지만, 많은 산모가 출산 뒤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감정의 변화가 심하며 눈물이 나오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상을 경험한다. 보통 출산 뒤 1주일 이내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오래가도 2주 이상 계속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출산 뒤 2∼3개월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를 키울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심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다. 산모의 10∼15%는 장기간 지속되는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빈 둥지 신드롬’으로 자녀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찾아오는 상실감이나 허탈감도 우울증을 유발하는 데 한몫한다.

우울증 방치하면 뇌 손상 입어

만일 출산 전후에 내과 치료를 받는 여성이라면 우울증 유발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 이때 심한 호르몬의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게스테론·에스트로겐 등의 호르몬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코르티솔·갑상선호르몬 등이 저하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출산 직후의 여성에게 호르몬을 투여하면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임상적인 효능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호르몬 투여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한편 여성암과 우울증의 상관관계가 일부 밝혀지기도 했다. 유방암 환자들이 복용하는 ‘타목시펜’(tomoxifen)이 에스트로겐 양을 크게 줄여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과 질환 치료에 쓰이는 약물이 우울증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인 의기소침이나 우울한 상태라고 해서 우울증으로 진단받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체적(음식 장애, 수면 장애, 성(性) 장애 등) 증상은 물론 정신적(정신적인 고통, 지적 장애, 무기력, 흥분하기 쉬운 상태 등)·사회적(가정과 직장에서의 자기 상실 등) 증상에 따라 이뤄진다. 물론 쭝(Zung)씨 우울증 자가 척도에 따라 간단한 문답으로도 우울증을 판단할 수 있다. 이렇듯 정신과를 찾거나 스스로 진단이 가능한 우울증을 방치하면 뇌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 예컨대 우울증 환자는 편도체의 중심 핵 부분이 작아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분비가 많아져 해마상 융기가 줄어드는 식이다. 또 내분비 계통의 대사 이상이나 두뇌의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 심각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아직까지 몸과 마음의 관계는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신계와 면역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미국 듀크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전문의 에드워드 수아레스 박사는 지난 9월 의학저널 에 분노나 적개심, 우울증 등의 부정적 감정이 동맥의 염증을 나타내는 C-반응성 단백질(CRP) 혈중 수치를 증가시킨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따른다면 내과 질환과 우울증의 상관관계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울증으로 인해 내과 질환이 발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11월 첫쨋주 ‘우울증 선별 주간’에 전국의 23개 종합병원과 정신보건센터에서 자신의 마음을 무료로 살펴볼 만하다(문의: 02-709-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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