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연극 ‘리어왕’에 출연해 시연하는 배우 이순재. 연합뉴스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이자 영원한 ‘국민 아버지’로 불리던 배우 이순재가 2025년 11월25일 별세했다. 향년 91.
고인은 이날 새벽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떴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며, 한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얼마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해온 고인은 2024년 10월 건강이 악화해 출연 중이던 공연을 취소했고, 2025년 들어 대외 활동을 중지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 태생인 고인은 서울대 철학과에 다니던 1956년 신영균, 이낙훈, 황은진 등 동기들과 함께 연극반에 참여하는 등 일찍부터 연기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이 해에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이듬해엔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 드라마 ‘푸른지평선’에도 출연했다. 특히 1970년대 한국방송(KBS) 드라마 ‘여로’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대사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깊은 설득력을 담아내는 뛰어난 연기로 출중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21년 연극 ‘리어왕’에 출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포즈를 취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정통 사극부터 시트콤에 이르기까지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를 오가며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은 연기를 펼친 ‘천생 배우’였다. 1991년 50대 후반에 출연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평균 시청률이 역대 1위인 59.6%를 기록했고, 이후 ‘대발이 아버지’란 별칭으로 불렸다. 이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잠시 정계에도 몸을 담았다. 1992년 제14대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4년간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이후에도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에서 따뜻하면서도 고집 센 가장의 모습을 연기하며 ‘한국의 보편적인 아버지상’을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72살에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코믹하면서도 권위적인 ‘야동 순재’ 캐릭터를 소화했다. 젊은 세대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연기력’을 보여줬다. ‘상도’, ‘장희빈’, ‘불멸의 이순신’, ‘이산’ 등 사극을 비롯해 ‘흥부네 박터졌네’ 등 현대극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했다. 2013년엔 여행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하며 예능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2024년엔 ‘2024 한국방송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역대 방송 3사 연기대상 수상자 가운데 최고령 기록이다.

연극 ‘리어왕’ 포스터. 제작사 제공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한 그에게 연기의 뿌리는 언제나 연극 무대였다. 그는 “연기는 연극 무대에서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내세우며, 바쁜 방송 일정 속에서도 틈틈이 연극 ‘리어왕’, ‘아버지’, ‘사랑해요 당신’, ‘장수상회’ 등 대작의 주역으로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특히 연기 인생 65년을 맞았던 2021년에 출연한 ‘리어왕’에서 200분이 넘는 긴 공연을 단일 캐스트로 소화하며 연극계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80대 후반에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해 몇시간 동안 무대를 누비며 밀도 높은 연기를 풀어냈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숨 쉬는 동안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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