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영화 ‘1980 사북’의 한 장면. 국가는 광부들을 ‘산업전사’라고 칭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저임금과 혹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한 해 평균 광부 200명이 탄광에서 사망하던 시기였다. 엣나인필름 제공
소요? 사태? 항쟁? 운동?
여기, 무려 4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투쟁이 있다. ‘역사적 평가’에 앞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사건의 진상마저 아직 확실히 규명된 바 없는 잊힌 투쟁. 바로 1980년 4월 발생한 강원도 정선 사북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2025년 10월2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1980 사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45년 전 그 사건을 ‘기록자’ 입장에서 철저하게 훑어가는 데 집중한 작품이다. 영화를 만든 박봉남 감독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관련자 100여 명을 인터뷰하고, 원본이 남아 있는 아카이브만을 골라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 1980년 4월 투쟁의 진실을 쫓았다. 10월28일 영화를 만든 박봉남 감독을 만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 험난했던 과정을 자세히 들어봤다.
사북 투쟁은 당시 동양 최대 민영 탄광 기업이던 ㈜동원탄좌 노동자들이 1980년 4월21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며 시작됐다. 광부들이 원한 것은 간선(대의원 투표)으로 당선된 이재기 노조위원장의 어용 행위를 끝내기 위한 노조 직선제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 지프가 돌진해 노동자 한 명이 크게 다치면서 분노가 폭발한 광부들은 사북지서를 파괴하는 등 투쟁 수위를 높인다. 여기에 무리한 진압 작전이 더해지며 경찰 한 명이 사망하자, 국가는 공수부대를 위주로 편성한 계엄군 투입을 결정한다. 다행히 김성배 강원도지사의 중재로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지만, 이후 국가는 약속을 어기고 계엄사를 중심으로 합동수사팀을 꾸려 광부와 부녀자 등을 모질게 고문하고 28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유죄 판결을 내린다.
“한 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탄광에서 사망하던 시기였어요. 아무도 그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았죠. 국가는 그들을 ‘산업역군’이라고 칭했지만, 사실 광부들은 ‘소·돼지 축사’ 같은 판잣집에 살며 제대로 된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착취 당했죠.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값싼 연탄을 때며 살았던 거예요.”

공수부대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사북 광부가 된 강윤호씨는 사건 당시 무기고 파손 혐의로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고 2년형을 선고받았다. 2022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었던 그는 2024년 세상을 떠났다. 엣나인필름 제공
사북 투쟁을 잘 알지 못했던 박봉남 감독에게 사북을 소개한 것은 대학 1년 선배인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이었다. 2019년 걸려온 전화 한 통. “2020년이 사북 항쟁 40주년이니 사북에 한번 와보라”는 권유였다. 영화의 화자로도 등장하는 황 소장은 “나만 사북을 탈출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사북 투쟁 연구를 시작했다. 황 소장의 친형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처음엔 한 3년이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북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아카이브가 없었어요. 영상, 사진, 증언, 문서 등을 싹싹 긁어모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생사조차 불분명한 광부들, 진압에 참여한 경찰들, 당시 취재했던 언론인들, 어용으로 몰렸던 이재기 지부장의 가족까지….”
그렇게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박 감독을 머뭇거리게 한 건 지금까지도 사북 투쟁을 검색하면 첫머리에 뜨는 사진 한 장이었다. 시위대 한가운데 기둥에 묶인 여성의 사진. 그는 당시 어용 노조위원장이라며 광부들의 분노를 산 이재기씨의 아내, 김순이씨였다.
“광부들이 ‘이재기를 찾아내라’며 김순이씨를 묶어놓고 폭력을 자행한 거죠. 이 사진이 당시 보도 통제하에 있던 전 일간지에 실리면서 사북 사건은 ‘광부들의 폭력적 소요’로 낙인찍히게 됐어요.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사건이었어요. 김순이씨는 무고한 피해자잖아요. 이 지점에서 광부들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이죠.”
김순이씨 감금·폭행은 사북 투쟁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박 감독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기록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아직도 직접적인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은 당시 정황, 김순이씨의 피해 사실, 그 가족의 분노 등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들어 있다.
“광부들뿐 아니라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무조건 다뤄야 했어요. 몇 달을 고민했지만, 하나의 사건에 두 개의 주장과 두 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거기에 충실하자.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이 바로 기계적 중립이나 양비론과는 다른, 그 균형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는 또 있다. 당시 진압에 투입됐던 경찰들이다. 영월경찰서 순경으로 진압 작전 도중 큰 상처를 입었던 진문규씨는 영화 속에서 당시 상황을 진술하며 눈물을 보인다. “저도 광부의 자식입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저도 탄을 캔 경험도 있고요. (당시 다친 저를) 후송해준 것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지 알 수 없는) 광부였어요. 나를 이렇게 (울먹이며) 껴안고 있었어요.”

다큐멘터리영화 ‘1980 사북’의 박봉남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박 감독은 이 영화가 사북민주항쟁동지회(광부들)도, 이재기씨 유족도 만족시킬 수 없으리란 것을 처음부터 각오했다. 2025년 4월, 사건 45주년을 맞아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상영회에선 도중에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에서도 이재기씨 유족(김순이씨 가족)과 사북항쟁동지회 회장 출신이자 당시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원갑씨는 서로를 향해 서로를 헤집는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는다.
“탐욕스러운 기업과 무자비한 고문·폭력을 자행한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 분노가 서로를 겨누고 있어요. 노동자의 정당한 쟁의에 신군부가 폭압을 행사한 사건인데, 노동운동사나 민중운동사에서 사북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커요. 다만 광부들이 국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투쟁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으려면 김순이씨 사건에 대한 사과도 더불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화해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광부 대표 격인 이원갑씨는 김순이씨에게 보내는 4장짜리 편지를 쓴다. 편지의 원본은 이원갑씨가, 사본은 박 감독이 보관하고 있다. “변명과 억울함, 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인 장문의 편지예요. 이원갑씨가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광부들을 대표해 사과편지를 쓴 것이 진정한 화해의 첫걸음이겠죠. 이 편지가 언젠가 (김순이씨 가족에게) 전달돼야 마무리가 된다고 봐요. 그것이 광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싶어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요.”
국가의 사과 역시 45년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8년과 2024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그사이 이원갑, 신경, 황한섭, 강윤호씨 등이 재심을 통해 잇따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응답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막장’이라고 하잖아요? 당시에도, 지금도 광부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깔려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 수많은 투쟁과 운동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받았어요. 광부들의 투쟁이 아니라 지식인·정치인·언론인이 관여된 사건이었다면 학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연구했을 거고, 각종 기념사업 같은 것도 이미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박 감독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했다.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은 탓이다. “실제 국가폭력의 말단에서 광부들을 고문했던 계엄사 인원, 정보과 형사 중에 일부라도 밝혀 사과해야 피해자들이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추적해 영화에 담지 못한 게 아쉬워요. 또 당시 연행돼 조사받은 160여 명 중에 제가 찾아낸 50여 명 외에 100명 넘는 피해자의 정확한 피해 사실도 파악해야죠. 영화는 사건의 실체를 절반도 채 드러내지 못했다고 봅니다.”
엔딩크레디트에는 인터뷰에 응한 광부 중 상당수의 이름 앞에 ‘고’자가 붙어 있다. 엔딩크레디트가 완전히 다 올라가기 전에 자리를 쉬이 떠날 수 없는 이유이자, 이 사건의 올바른 매듭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이다.

동원탄좌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모습.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해 아쉬운 이야기도 많다. 박 감독은 특히 박근식(사건 당시 38살)씨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동원탄좌 노조 대의원이었고, 20일간 구금돼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노동을 할 수 없었던 그는 3년 뒤 사북을 떠나 울산으로 갔다. 생계는 아내가 전담했고, 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8년 만에 울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족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아들이 셋이더라고요. 첫째 아들은 이른 나이에 전기기사로 일하다 감전사고로 양쪽 팔과 한 다리를 잃었고, 막내아들도 산재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대를 이은 비극의 시작이 바로 사북이었던 거죠. 그분이 고문받고 풀려났을 때 아내에게 했던 유일한 말이 ‘아들뻘인 군인에게 맞는 게 너무 슬펐다’였대요. 박근식씨같이 이름 없이 숨어 산 광부와 그 가족이 얼마나 많을까요?”
작은 영화지만 ‘1980 사북’은 50개의 상영관을 확보했다. 박 감독은 많은 이에게 이 영화가 ‘다크투어리즘(역사교훈여행)의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만큼 영화는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게 박 감독의 설명이다. “사북 사건은 광주민주화운동 약 한 달 전에 벌어졌어요. 당시 사북에 투입하려고 준비 중이던 제11공수특전여단은 결국 광주로 향해요. 보기에 따라 사북은 광주의 전초전이었던 거죠. 당시 극적 타결이 안 됐다면 광주보다 먼저 사북에 계엄군이 투입됐을 거예요.”
영화에 구체적으로 담진 않았지만, 광부들이 고문받다 최종적으로 일부가 기소되고 나머지가 풀려난 건 1980년 5월27일이었다. 신군부의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진압했던 날이다. 광부들에게 “김대중의 사주” “간첩” 등의 혐의를 씌우고 고문했던 계엄사는 5월27일을 기점으로 그런 혐의를 거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첫 지방 순시 장소로 사북을 택한다. 사북엔 아직도 ‘대통령 오신 우리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12·3 계엄 사태를 겪으며 ‘빛의 혁명’에 참여했던 2030 젊은층에도 이 영화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박 감독은 말한다.
“영화 개봉을 준비하던 중 12·3 계엄 사태가 벌어졌어요.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1980년 계엄법 제9조와 윤석열의 계엄포고령은 동일합니다. 국가가 필요에 의해 언제든 같은 방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우리에게 닥칠 수 있었던 일을 사북이 이미 보여준 거예요. 우리가 애써 일군 민주주의가 당장 40년 전, 50년 전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요.”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1980년 4월22일, 사북광업소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안경다리에서 광부들과 진압경찰이 투석전을 벌이는 모습. 엣나인필름 제공

당시 광부들이 거주했던 동원탄좌 중앙사택 모습. 엣나인필름 제공

아직도 사북에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표지석. 사건이 발생하고 불과 6개월 후인 1980년 10월, 전두환은 대통령으로서 첫 지방순시로 사북을 방문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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