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에 잠긴 뒤 모습을 드러낸 반구대 암각화. 김호석 제공
매년 3월 초 오후 5시쯤이면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천 계곡 상류 북쪽 비탈에 뉘엿뉘엿 햇빛이 스며든다. 가로세로 8×4.5m의 거대한 바위면 위에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가 동에서 서로, 스크린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불과 2~3㎜ 깊이로 정교하게 파인 골을 따라 만들어진 음영이 6천 년 전 세상을 현현하게 비춘다. 암각화 속에서 큰 뿔이 우람한 백두산 사슴 세 마리가 서쪽으로 뛰어가고, 혹등고래 한 마리가 수면을 박차고 오르며, 한반도 호랑이 한 마리가 등을 바짝 세운다. 고래 20여 마리는 거대한 몸을 솟구쳤다가 물속에 뛰어들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렇게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이다.
2025년 7월12일 ‘반구천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반구천 암각화는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군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포괄하는 명칭이다. 1970년 천전리 암각화가, 1971년 반구대 암각화가 각각 국보로 지정되고 50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이 작품에 대한 이해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전체와 각각의 그림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는 물론이거니와 동물의 종·크기·방향에 따른 분류 등 기본적인 사항도 파악되지 않았다.
심지어 개별 그림 수가 몇 점인지조차 정확하지 않다. 국가유산청은 누리집에 반구대 암각화 개별 그림 수를 ‘200여 점’(안내판 설명)과 ‘300여 점’(국가유산 설명)으로 다르게 적어뒀다. 이에 한겨레21은 40여 년 동안 한국은 물론 몽골·러시아·카자흐스탄 등을 85차례 방문하며 북방 아시아 암각화 100만 점 이상을 조사·수집·연구해왔고, 2008년 ‘한국의 바위그림’(문학동네 펴냄) 등 반구대·천전리 암각화 관련 책 4권을 펴낸 수묵 화가 김호석(68) 화백에게 ‘반구천 암각화’의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김 화백은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뽑혔고, 2000년 광주비엔날레 한국 대표작가로 뽑혔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 영정으로 사용된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선발된 극소수의 뛰어난 예술가에 의해 집중적으로 그려진 매우 잘 그린 그림으로 하나하나 허투루 그린 것이 없다”며 “가로 그림 위에 세로 그림을 배치하는 등 화면에 예술적 긴장미를 유지했다”고 강조했다. 2025년 7월21일 김 화백을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새끼를 머리 위 분기공 부근에 얹고 물 밖으로 내어 숨을 쉬게 해주는 수염고래. 김호석 제공
—반구대 암각화가 북쪽을 바라보는 점이 매우 독특한 장치라고 강조했다.
“북방 아시아는 물론 베트남·인도 등까지 전세계 암각화를 보러 다녔지만 북쪽을 바라본 건 반구대 암각화가 유일합니다. 천전리 암각화도 그렇고 보통은 정남향이나 동남향이거든요. 동쪽에서 뜬 해가 비춰 암각화가 살아나고 정오쯤 되면 전체가 밝아지고 저녁때가 되면 소멸합니다. 해가 뜸과 동시에 살아나고 햇볕이 쬐는 시간이 긴 장소를 선택한 거죠. 근데 반구대는 약간 서쪽으로 기운 북향입니다. 자오선의 미묘한 기울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빛에 완전히 드러나는 시간이 해가 지기 한두 시간 전 두 시간 남짓입니다.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김호석 제공
특히 3~4월에 오후 5시쯤이면 한 10분 정도 마치 레이저 쇼를 하는 것처럼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빛이 서서히 비추고, 반구대 암각화를 음영으로 현현하게 드러냅니다. 이때가 반구대 암각화를 감상하는 최적기입니다. 그런 빛 조건을 의도적으로 고려했을까요? 이 어둠 속에서, 음영 속에서 그림을 자꾸 보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다른 암각화와 달리 반구대는 제의적, 천도(薦度·죽은 생명의 넋을 기원하는 일)적 성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개가 등장하지 않고 사냥이 주제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보통 암각화 주제 중 하나가 화살을 쏘거나 개들을 이용해 협동작전을 해서 사슴 같은 동물을 공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에는 사냥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개가 단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미늘이 꽂힌 고래도 등장하지만 그냥 죽음 자체를 그렸지 사냥 방법을 묘사하거나 요동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암각화를 그린) 목적이 다른 거죠.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아먹었지만 고마워해야 하는 동물의 영혼을 위해 ‘비나이다, 비나이다’ 푸닥거리하는 장소였을 겁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북쪽을 바라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호랑이나 표범을 그릴 때도 발톱과 이빨을 강조하는 다른 암각화들과 달리 공격성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이빨도 그리지 않고 발톱은 동그랗게 그렸습니다. 우리는 호랑이라고 하면 인간의 관점으로 보기 쉽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욕심에 경도돼 특징을 잡다보니 (호랑이의) 공격성이 드러나는 거죠. 하지만 한반도에 살던 선조들은 호랑이가 사나워야 한다는 선입견을 덜어내고, 동물의 어떤 본질을 보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 민화에서도 호랑이를 사납지 않고 해학적으로 그리는데, 한국 미의식의 저변에 있는 순일한 미적 의식을 엿볼 수 있죠. 우리 미술의 최고 경지를 소쇄담박(瀟灑淡泊·기운이 맑고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이라고 하는데 그 경지가 우리 미술의 시원인 반구대에서 드러납니다.”

2025년 7월21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호석 화가. 최근(7월6∼13일) 몽골 알타이 암각화군 현장 답사를 다녀오는 등 암각화 조사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고래의 생태적 특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296점의 개별 그림이 표현돼 있는데, 고래가 50마리에 이릅니다. 명확하게 종 구분이 되는 것만도 북방긴수염고래, 귀신고래, 수염고래, 혹등고래, 향고래, 들쇠고래, 돌고래, 범고래 등 8종입니다. 왼쪽 중간 부분에 등지느러미가 없는 점이 특징인 북방긴수염고래 세 마리가 위쪽으로 헤엄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몸을 상하로 구부리며 물을 가르는 생태를 묘사합니다. 두 개의 분기공에서 브이(V)자형 물줄기를 분기하는 모습까지 정확하게 그립니다. 통통하면서 매끄럽게 묘사된 형태에서 북방긴수염고래의 탄력이 느껴집니다. 또 목 쪽에 5개의 굵은 주름이 있는 귀신고래, 새끼를 머리 위 분기공 부근에 얹고 물 밖으로 내어 숨을 쉬게 해주는 수염고래가 하늘을 향하고, 배 쪽 전체에 길고 깊게 팬 주름이 있는 혹등고래가 땅을 향합니다. 이렇게 생태적 특징을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건 고래류를 너무나도 잘 알았고 아주 익숙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죽은 고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습을 선 하나로 이렇게 생동감 있게 그린다는 건, 정말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육상동물은 측면으로 그린 반면, 고래 등 해양동물은 부감(俯瞰·높은 곳에서 내려다봄)법으로 그렸습니다. 육상동물과 해양동물을 그리는 법을 바꿨다면 특징 구분이 안 됩니다. 어떤 사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시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었던 거죠. 매우 우수한 예술가 집단이 창작하지 않고선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어요. 고래류를 그린 다른 사례로는 러시아 카노제로(Kanozero) 암각화가 있는데 여기선 고래 형상이 전부 같아요. 구분하지 않은 거죠.”
—1965년 사연댐 준공 이래 반구대 암각화는 60년째 매년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며 훼손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사연댐에 수문 3개를 만들어 수위를 낮춘다고 하는데,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에 지정할 때 ‘사연댐 공사의 진척 상황을 세계유산센터에 보고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2003년부터 반구대 암각화 지키기 시민운동을 주도해오셨죠.
“반구대 암각화는 점토가 굳은 변성암이 지각변동으로 땅이 갈라질 때 방생한 열로 인해 겉면이 도자기 유약처럼 변한 2~3㎜ 혼펠스(hornfels) 층을 파내 그린 것입니다. 그 점토가 울산시의 수위 조절 거부로 60년간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급격하게 파괴됐습니다. 연구자들에 의한 반문화적 시련도 심각합니다. 조사한답시고 배를 고정하려 암각화에 구멍을 뚫고, 석고를 암각화 면에 대고 눌렀다가 떼어내면서 파손되고, 혹한기에 탁본한다고 불을 피워 열을 가했다가 물을 뿌리고, 무분별한 도탁(盜拓·허가 없이 몰래 탁본을 뜨는 일)도 수없이 이뤄졌습니다. 서울대 석조문화재연구소라는 곳은 (2003년에) 반구대 암각화의 강도를 측정한답시고 콘크리트 강도를 실험하는 도구인 슈미트해머로 200여 군데를 쏘기도 했습니다. 처음 학계에 보고된 1971년과 비교해보니 2010년 기준으로 150여 곳이 떨어져 나갔더라고요. 지금은 더할 겁니다. 반구대가 침수되지 않도록 53m가 되면 물이 넘치는 수문을 만들자는 주장을 2003년부터 해왔습니다. 그게 20여 년이 지나서 실현됐어요.”

반구대 암각화 중 호랑이와 혹등고래. 김호석 제공
—10만원권 지폐에 반구대 암각화가 담길 뻔했다고요.
“2005~2007년 한국은행 고액권 화폐 도안 자문위원을 맡아 10만원권을 디자인했어요. 청색 계열이라 훨씬 더 청수(淸秀·깨끗하고 빼어남)하게 느껴졌죠. 2007년 말 시안이 나와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자문위원 5명이 서명했습니다. 앞쪽에 안경 낀 김구 선생을 그렸고, 김구 선생 오른편에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들이 배치됐어요. 뒷부분은 세로 방향으로 만들었어요. ‘동해 물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주제로 가운데 대동여지도를 넣고 백두산을 강조했죠. 바다에 반구대 암각화에서 딴 고래와 상어를, 육지에는 호랑이·사슴·산양 등을 집어넣었죠. 독도 위치에 무릎을 굽힌 채 ‘멀리 내다보는 사람’ 그림을, 역시 반구대 암각화에서 따서 넣었죠. 해양으로 진출하는 한반도의 특성, 웅혼한 기상을 가졌던 유목민의 이동과 문명 정신을 표현하려고 반구대 암각화를 활용했죠. 그러던 것이 뉴라이트 쪽에서 ‘어떻게 살인자를 돈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 ‘이승만으로 바꿔라’ 등으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10만원권 발행을 보류했죠. 시대의 아픈 자화상이에요.”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미술은 발전하거나 진보하지 않아요. 새롭게 해석될 뿐이죠. 옛날 그림이라고 지금보다도 원시적이거나 지금보다 못 그린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림은 한 붓으로 간명직절(簡明直截·에두르거나 모호함이 없음)하게 단순한 선을 그리기가 제일 어려워요. 여기(바위면) 선(線) 하나를 잘못 그었다, 의미가 깨져버리는 거예요. 근데 이 암각화는 계획돼 있잖아요. 진정한 명화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계획돼 있어요. 우리가 캄캄하거나 희망이 없을 때, 갈 길을 잃었을 때 뒤를 돌아보고 갈 길을 다시 다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그림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봐라. 순하고 맑고 깨끗하지 않으냐.’ ‘세로와 가로를 이렇게 구성한 화면 구성으로 긴장미를 주고, 여백을 비워놓고 깨끗하게 바람이 소통하는 느낌을 주지 않느냐.’ 제가 암각화를 보듯 암각화도 저를 보고 말을 걸어요.”

김호석 화가가 그린 ‘죽음을 넘어 민주의 바다로’(1993,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김 화백은 암각화를 보면서 느낀 점들을 꾸준히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시간에 발생한 일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는 양식인 이시동도(異時同圖)가 암각화에서 차용한 대표적 기법이다. 성철 스님의 다비식을 그린 ‘그날의 화엄’(1998년, 해인사 백련암 소장),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 행렬을 담은 ‘죽음을 넘어 민주의 바다로’(1993 ,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등이 그렇게 그려졌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거북이와 고래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사람’(윗부분 가운데). 김호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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