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더 글로리>의 주요 장면과 결말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3년 3월10일, 함께 대화하던 지인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더 글로리> 봐야 해서 그럼 전 이만.” 그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의 빠른 귀가 사유를 납득했다. 문동은의 ‘18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도 그 복수를 오래 기다렸다는 듯 <더 글로리> 파트2가 공개되자마자 기꺼이 그 세계에 몰입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더 글로리>에 매료됐을까?
일단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19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라는 주여정의 말처럼, 폭력으로 인해 ‘지옥’을 살아야 했던 피해자가 영광과 명예를 회복해 “지금보다 덜 불행한” 시간을 살게 되는 것. 드라마는 그 목적을 향해 물러섬 없이 전진한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분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대본을 썼다고 하니 동은의 복수는 극 중 인물들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누군가에게도 응원가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성공한 복수극이다. 복수에 성공했다는 면에서 그렇고, 드라마 세계에서 이미 흔한 소재가 돼버린 ‘사적 복수’를 더 폭넓게 이해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그 어떤 것도 예솔이 잘못이 아니야.”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다 아빠 품에 안겨 울며 그 상황이 자신의 잘못인 양 미안해하는 예솔에게 하도영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동은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자, <더 글로리>를 관통하는 주제일 것이다. ‘파트1’ 속 동은이 처한 상황은 끔찍한 폭력을 “사회적 약자”여서, “너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야”라는 말로 정당화하며 그저 개인의 문제와 불행으로 여기게 했다. 살기 위해 낸 자퇴서에조차 ‘부적응’이라는 낙인이 찍혀야 했다. 그렇게 동은의 피해는 물론, 회복도 스스로 해야 할 개인 문제로 취급됐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동은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공적 시스템(경찰과 학교)은 책임을 방기했고, ‘혈연’ 가족은 ‘첫 번째 가해자’가 됐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동은(과 동급생들)과 강현남이 겪은 폭력의 문제가 단지 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계급 격차, 공적 시스템의 불의와 부재 등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임을 분명히 전달한다.
대부분의 ‘복수’는 공적 해결의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의 복수 또한 그 출발점은 ‘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는 ‘공적’이다. 비록 (여정의) 사회적 지위와 자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다분히 능력주의에 기반을 뒀으며, 잔혹한 보복의 속성을 가진다는 면에서 한계가 있었지만, <더 글로리>의 복수는 일부라도 법적인 정의 실현으로 매듭지어졌다는 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은이 피해자가 돼야 했던 이유는 사회공동체와 온당한 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뒤늦게라도 동은이 정당하게 누리지 못한 것(사회적 보호와 공적 해결)을 돌려줘 그 힘으로 복수를 완성하게 된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 드라마의 복수는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는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라는 동은의 질문에 관한 대답이기라도 하듯,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자멸로 완성된다는 면도 인상적이다. 권력과 자본으로 형성된 계급의 위력에 대항하는 ‘없는 것들’의 선의와 연대는 대체로 무력하지만, 그 견고한 ‘가해자들의 연대’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설정은 비록 현실과는 무관한 판타지일지라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해자들의 관계성과 공동체성은 결국 동은을 위태로운 죽음의 난간에서 안전한 삶의 공간으로 옮기는 힘이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동은은 세 번 죽을 결심을 하는데 첫 번째 죽음의 난간에서 그를 돌이켰던 힘은 복수를 향한 자기파멸적 의지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른 이를 살리고자 한 결단이었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그 관계성과 공동체성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는 복수다. 동은은 현남뿐 아니라 그의 딸 선아도 폭력의 세계에서 구원하려 하고, 현남 또한 자신이 위험해진 상황에서도 동은과의 약속을 지킨다. 동은의 복수는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 여정의 복수를 돕는 것으로 이어지고, 죽은 윤소희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동은은 자기 다음으로 폭력의 희생자가 돼야 했던 경란을 도우며 “그 체육관에 더는 서 있지” 말라며 당부한다. 그 책임성이 한국 사회가 그토록 강조한 ‘혈연’이 아닌 ‘비혈연’ 관계에서 발현된다는 면도 의미 있다. 동은과 연진의 엄마는 각자의 욕망을 따라 자식을 활용하고 버렸지만, 하도영은 전재준의 딸인 예솔을 책임지기 위해 자기 삶을 건다.
반면 가해자의 연대는 “학폭은 너나 상관 있지 우리 같은 일반인이 무슨 상관”이라던 이사라의 말처럼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효용가치가 떨어졌을 때 가차 없이 배신한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연대는 무력하지만 서로를 살리는 일에는 강하고, 가해자들의 연대는 견고하지만 한번 무너지면 서로에게 지옥이 된다. 나는 이런 <더 글로리>의 복수를 피해자들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적 복수’라 부르고 싶다.
물론 “맹목적인 선의와 윤리는 허울뿐인 영광, 그뿐”이라는 주병원 원장 박상임의 말처럼 우리의 선의와 윤리는 무력하기만 할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허울뿐인 영광을 강요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그런 선의와 윤리는 피해자를 위한 게 아닌, 가해자 중심의 언어가 되기 쉽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신’이 있다. 그래서 복수는 그 신을 향한 강력한 항의로 이해되곤 한다. <더 글로리>도 마찬가지다. 여러 ‘신’이 나오지만, 그 신은 동은의 편이 아니었다. 동은이 당한 폭력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신이며, 심지어 가해자의 악행에 이용당하는 무능한 신이다. 그 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도 <더 글로리>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화해·회복·구원을 말하며 그것이 피해자가 피해자의 자리에서 빨리 벗어날 방법이라 우기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은 가해자가 죄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법적 정의가 실현됐을 때나 겨우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알아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용서나 화해는 성립될 수 없고, 그런 과정 없이 피해자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살인자 강영천의 말이 흥미로웠다. 그 ‘죗값’은 과연 누구에게 치렀을까? 이 말은 “나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영화 <밀양>에 등장한 가해자 말의 변주다. “나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과 “나는 이미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말은 그리 다르지 않다. 얼핏 거룩하게 여겨지지만,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또 다른 폭력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신의 침묵과 방관도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가해일 뿐이다. <더 글로리> 속 피해자들의 복수는 신의 침묵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대항하는 것으로 신의 방관 혹은 침묵에 대답하려는 저항에 가깝다.
그런 동은에게도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라던 고백처럼 신이 개입한 순간들이 있었다. 양호 교사와 공장 후배를 비롯해 자살하려던 그에게 “봄에 죽자”던 ‘빌라 할머니’와 동은의 방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예의를 갖춘 도영에 이르기까지. 동은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정적 순간에 우연처럼 반복된 ‘신의 개입’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피해자가 온전하게 회복되긴 어렵다.
그렇기에 <더 글로리>의 복수는 사라가 하필 자기 아버지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마약을 투여한 채 환각 상태로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몰락하고, 신을 이용해 이익을 도모한 연진 어머니와 불의한 경찰이 몰락하고, 그를 도운 무당이 급사하는 등 ‘신의 형벌(벌전)’의 속성을 가진다. 이런 단호한 응징은 자비와 사랑의 신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자비와 사랑의 신은 피해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폭력과 불의를 외면하지도 않는다는 걸, 그 신이 때로는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얼굴로 나타난다는 걸 명징하게 보여준다.
<더 글로리>의 복수가 흠이 없고 대안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윤리적·계급적·젠더적 한계를 가졌다는 비판도 얼마든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됐던 ‘사적 복수’ 서사를 더 사회적·공동체적 관점으로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인 복수극으로 이해하고 싶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피해자가 ‘폭력의 시간’에서 벗어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유일하고, 복잡하고, 지난하고, 고된 공동체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상처 위에 더 깊은 상처를 내야” 한다던 여정의 말처럼 비록 쓰리고 불편하지만 그 복수 과정을 통과해야 우리는 무엇이 폭력인지, 용서와 화해와 구원은 어떻게 불/가능한지, 그 복수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피해자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다음 봄’을 기다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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