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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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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이야 자기야 봄에 속삭여 부르면

[레드기획 구근 심는 봄] 봄이면 환해지는 구근식물의 매력, 알전구처럼 빛을 움켜쥐고 있다가 날이 풀리면 스위치를 켜네
등록 2023-03-17 16:07 수정 2023-03-24 00:02
구근식물은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의 서사를 지녔다. 새가 날개를 접은 듯한 튤립. 이혜미 제공

구근식물은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의 서사를 지녔다. 새가 날개를 접은 듯한 튤립. 이혜미 제공

늦겨울에서 초봄으로 건너가는 환절기는 제가 가장 조바심을 내는 계절이자 실은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오래도록 봄을 기다린 마음에 더해, 이르게 개장한 화훼시장에는 반가운 모종이 가득 들어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오가며 한두 개씩 화분을 사다 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화훼(花卉)라는 말은 무척 상쾌한 어감을 가졌네요. 화- 훼- 천천히 발음해보면 몸 안쪽에 고여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며 깊은숨을 내쉬게 되는군요. 소리의 끝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특유의 시원하고 투명한 느낌이 입안을 휘돌며 사라집니다. 꽃과 풀의 기운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허밍입니다.

이른 줄 알면서도

야생화인 매발톱과 약용으로도 쓰이는 당귀, 생명력이 강한 꽃잔디는 월동을 마치고 조금씩 싹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모종을 심기엔 아직 추운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화원에 들렀다가 푸른빛과 분홍이 묘하게 조화된 수국이 예뻐 무작정 사다 심었더니, 밤사이 영하로 내려간 추위에 냉해를 입어 잎이 검게 얼어버렸습니다. 수국의 눈치를 살피며 잎사귀를 만져보니 누렇게 변해버린 꽃잎에서 어떤 체념의 빛이 느껴졌습니다. 섣부른 고백이 상처 입어 시드는 모습을 본 것 같아 죄스럽고 슬픈 마음으로 화분을 안으로 옮겨두었습니다. 햇빛이 잘 비치는 베란다에 놓아뒀다면 조금 춥기는 했겠지만 얼지는 않았을 텐데…. 이른 줄 알면서도 화분을 사들이는 이유는 얼마 남지 않은 봄을 어서 눈앞으로 당겨오고 싶은 욕심이겠지요.

살아나는 일, 받아들이는 일, 애써 되살아나는 몸집을 돌보는 일, 모든 것이 엉킨 초봄의 옥상 화단. 이혜미 제공

살아나는 일, 받아들이는 일, 애써 되살아나는 몸집을 돌보는 일, 모든 것이 엉킨 초봄의 옥상 화단. 이혜미 제공

제가 사는 옥탑은 볕이 잘 들지만 노지인데다 화분에 키우는 것이라 식물이 추위를 잘 이기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 강하다는 능소화나 덩쿨장미도 옥상의 겨울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살아나는 일, 받아들이는 일, 애써 되살아나는 몸짓을 돌보는 일, 이 모든 에너지가 뒤얽혀 초봄의 옥상 화단은 기이한 웅성거림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맘때 가장 마음을 기대는 식물은 겨울을 견디고 다시 움트는 구근입니다.

땅속에서 알전구처럼 빛을 움켜쥔 뿌리는 날이 풀리면 스위치를 켠 듯 내면의 빛을 쏘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옥상 화단에 심어둔 구근은 튤립, 백합, 작약, 은방울꽃 그리고 랜덤. 갑자기 랜덤이라니 의아하겠지만, 제가 자주 가는 화원에서는 품종을 알기 어려운 작약이나 색 분류를 깜빡한 튤립 등을 종종 덤으로 얹어줍니다. 저도 그런 뿌리를 받아 조금쯤 무심하게 화분에 심어두지요. ‘랜덤 작약’ ‘랜덤 튤립’ 등의 푯말을 꽂아서요. 우연히 만난 꽃이 어떤 모양과 색깔로 자라날지 상상해보는 것은 비밀 상자에 담긴 선물을 풀어보기 전처럼 설렙니다. 기다리던 소식을 받아보는 것도 즐겁지만 예상치 못한 발견이 주는 기쁨은 우리 영혼을 볕 아래 널어둔 흰 빨래처럼 펄럭이게 하니까요.

심어둔 지 3년을 넘긴 작약이 드디어 화분 적응을 마치고 꽃을 피워올렸다. 이혜미 제공

심어둔 지 3년을 넘긴 작약이 드디어 화분 적응을 마치고 꽃을 피워올렸다. 이혜미 제공

처음 구근의 믿음직함을 깨달은 시간

작약이 제일 먼저 싹을 내지만 줄기를 뻗는 속도는 조금 더디고 의외로 성장이 빠른 것은 튤립과 백합입니다. 두 꽃 모두 봉오리가 새의 부리를 닮아 꽃을 피우기 전이면 초록빛의 아기 새가 땅을 뚫고 날갯짓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구근식물은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의 서사를 지녔구나, 땅속의 추위와 어둠을 뚫고 천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잎사귀와 줄기가 자신도 모르던 날개, 새의 전생이라면.

지난여름은 작약의 보답을 받은 해이자 처음으로 구근의 믿음직함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심어둔 지 3년을 넘긴 작약이 드디어 화분에 적응을 마치고 꽃을 내어준 것인데요. 저는 천천히 봉오리를 펼치는 작약 앞에 의자를 놓고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한 세계가 열리는 모습을, 어렵게 꺼내놓는 고백을 경청하듯 조심스럽게, 어떤 결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자세로, 작약을 방해하지 않으며 최대한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려 했습니다. 이미 엎질러져버린 마음이구나. 툭 터져 어쩔 수 없이 넘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 귀하고 안타까운 순간일 수밖에. 주먹을 굳게 쥐는 다짐도 있지만 움켜잡은 것을 놓아주는 용기도 있음을 작약에서 배웠습니다. 그럴 때 내 것이라 여겼던 세계가 문득 쏟아지며 새로운 무늬와 출입구를 얻게 된다는 것, 그러쥐고 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 비할 수 없는 빛을 만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약이야, 속삭이면 자기야, 수줍게 부르는 애칭 같아서 몸을 여는 꽃 앞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떠올렸습니다. 으레 애인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인 ‘자기’는 사실 ‘나 자신’이라는 의미지요.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을 나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은 자기 자신을 활짝 열어젖혀 당신과 가장 가까워지고 싶은,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도록 뒤섞이고 싶은 소망이 아닐지요.

뿌리를 심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

당장 꽃을 내어줄 기약도 없는 뿌리를 심어두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뿌리가 늘어날 때마다 멀리를 향해 보내둔 서신에 기대의 빛이 담긴 우표가 붙고, 불확실하게만 느껴지던 너머의 세계가, 미지의 시간을 지나갈 나에 대한 불안이 조금은 누그러집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어느새 구근을 심는 일을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 올여름에도 작약 앞에 앉아 하나 , 둘 , 그 꼭 쥔 주먹을 조심스레 펼쳐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날이 있으리라고 , 그건 지금 겪는 슬픔과 외로움을 뚫고 꼭 찾아가야 하는 장면이라고 . 작약과 함께 맞이할 여름을 떠올리면 북극해의 유빙을 가르며 나아가는 쇄빙선처럼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겨나는 듯합니다 . 다가오는 여름을 함께 기다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 보고 싶은 마음을 매듭지어 구근처럼 묻어두고 솟아오르는 빛을 준비하겠습니다 . 결실을 부르는 결심으로 .

글·사진 이혜미 시인·<식탁 위의 고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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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여름

이혜미

뭘 겁내 못 되돌려 그냥 지금 바라봐 여름이 장전한 눈빛을 알잖아 이제 와서 헤아리는 심정 생각보다 깊이 묻혔던 자기야, 부를 수 없이 저기요 별것도 아닌 일에 뒤돌아보는 고개를 봐 언제까지 저 뜨거운 뿌리의 자장을 외면하겠니 우리 아직 본 적 없지만 기꺼이 너그러이 마음을 내어줄게 자기야 작약이 세계를 찢으며 터져 나오는 시간이야 하나의 장면이 태어나고 마는 기쁨으로 그러니 스스로의 무게에 놀라 고개를 떨구더라도 아름답기를 포기하지 말자 여름 낮잠처럼 자장자장 다독이며 사라지려는 잠을 애써 덧대며 꿈꾸던 것을 마저 이으며 마음을 멈추지 말자 꼭 쥔 주먹을 조금씩 펼쳐내는 힘으로 휘몰아치는 작약에게 속삭이지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저기에서 자기까지 단숨에 피어나도록 스스로의 숙근을 자전하며 애태우며 서로의 문간을 서성이며 안녕 안녕 궤도를 맴돌다 서투른 허밍을 흥얼거리며 별의별 것이라고, 다시없을 우주라고 속삭이며 토닥이며 자장자장 자기야, 잠드는 작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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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근식물 심기/ ‘춘식’이를 심어보자

보통 식물이 파라면 구근은 양파다. ‘구근’ 한자를 풀어쓴 그대로 알처럼 생긴 알뿌리가 특징이다. 정원이나 밭에 심을 때는 흙 속 깊이 심고, 화분에는 윗부분이 조금 나오도록 심는다. 양파처럼 위아래가 명확하니 뿌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도록 해서 심는다.

봄에 심는 구근 달리아(다알리아), 글라디올러스, 아마릴리스 등

춘식구근이라 한다.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곳이 많다.

여름에 심는 구근 상사화, 네리네, 콜키쿰 등

하식구근이라 한다. 가을에 꽃이 피어 겨울을 지나 봄에 휴면에 들어간다.

가을에 심는 구근 튤립, 프리지어, 히아신스, 수선화, 무스카리 등

추식구근이라 한다. 가을에 심으면 월동한 뒤 봄에 꽃이 핀다.

*참조: ‘즐기는 산림청/셀프 홈가드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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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문화센터 식물 가드닝 강좌/ 이번 봄은 다를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가드닝 초짜라면 한겨레문화센터의 가드닝 수업을 듣는 건 어떨까. 2023년 처음 가드닝 카테고리가 마련됐다.

도시 식물 탐험대 도시에서 만나는 야생화를 귀여운 그림으로 소개해 인기를 얻은 <도시 식물 탐험대> 저자의 강의. 도시를 같이 걸으며 보도블록 틈새의 들풀을 발견한다. 4월1일부터 2회.

반려식물 그리기 식물세밀화가 조아나씨가 당신 옆의 식물을 집중해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3월28일부터 5회.

홈 플랜테리어 첫걸음 왜 나만 식물을 죽이나요? 잘 크던 해피트리 잎이 시들시들해요. 플랜테리어 업계 1위인 ‘마초의 사춘기’에서 각자에게 맞는 식물과 식물에 맞는 위치를 선택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비대면 강의. 3월24일 1회. 비대면 강의로 ‘플랜테리어 상담소’와 ‘가드너의 비밀 식물 생태 공식’ 강좌도 있다.

여름을 기다리는 다섯 가지 방법 이혜미 시인이 진행하는 식물살롱. 곧 모집 예정.

*스케줄이 변경될 수 있으니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gardenme.hanter21.co.kr/jsp/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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