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소식을 듣고,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입니다.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배우 오영수(78)가 2022년 1월9일(현지시각)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골든글로브 수상의 영예를 안은 뒤 넷플릭스를 통해 밝힌 수상 소감이다.
오영수는 이날 미국에서 열린 제7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티브이(TV)부문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 배우가 골든글로브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징어 게임>은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2개 부문 수상은 불발됐다.
2021년 12월12일 경기도 성남 위례신도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영수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반야심경’ 쓰는 장면에서 직접 글을 썼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글 하나를 써달라고 했다. 그가 에이포(A4) 용지에 쓴 글은 ‘緣’(인연 연)이었다. 그의 배우 인생과 <오징어 게임>과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떨까?
오영수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골든글로브의 백인 위주 회원 구성과 성차별 논란, 부정부패 의혹이 불거졌고 이런 분위기 탓에 오영수, 이정재와 황동혁 감독 등 <오징어 게임> 관계자들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오영수는 시상식과는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에게 처음으로 의미 있는 상이었던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을 때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93년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에서 도굴꾼 ‘국전’ 역을 맡아 이듬해 수상자가 됐다. 하지만 시상식엔 가지 않았다. 시상식이 열릴 때 연극을 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상을 주관한 언론사가 너무 영화와 텔레비전 위주로 시상식을 진행해 연극인들의 분노를 샀죠. 그래서 시상식을 비토(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연극하느라 바빴으니 못 간 거였죠.”
지금도 그랬다. 오영수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릴 때 연극 <라스트 세션>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징어 게임>과의 인연오영수는 <봄 여름…>을 얘기하며 “그 영화를 찍고 난 뒤, 나는 그 영화가 연기인생에 남는 마지막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내 이름을 알렸고, 영화 자체로도 괜찮은 작품이었으니까.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영화 제목처럼 계절이 순환하듯 그 작품은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남한산성>(2017)이었다. <봄 여름…>에 나온 오영수를 유심히 본 황동혁 감독이 그에게 출연을 제안했다. 이어질 듯한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오영수는 일정이 맞지 않아 제안을 받을 수 없었다.
계절이 계속 이어지듯 인연은 다시 찾아왔다. 2020년 11월 황 감독이 서울 대학로로 직접 찾아와 오영수가 출연한 연극을 본 뒤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오징어 게임> 출연 요청이었다. 이번엔 인연을 맺었다.
오영수는 <오징어 게임>으로 다시 선 굵은 작품을 남겼다. 글로벌 스타가 됐고, 골든글로브도 수상했다. 이게 끝은 아닐 터다. 계절이 이어지듯이 말이다.
오영수가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와 구슬치기를 하며 “깐부잖아”라고 말할 때 그의 표정엔 슬픔, 배신감, 애처로움, 희망이 묻어난다. 오영수는 이 장면을 찍을 때 속으로 울었다고 했다.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정직하게 살아온 기훈이 살기 위해 속이잖아. 인간의 한계를 느꼈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확 났어요.”
오영수에게 ‘깐부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맘에 드는지를 물었다. “‘깐부 할아버지’보다 ‘깐부 아저씨’가 더 좋을 텐데…”라는 농담을 먼저 던졌다. 오영수는 “‘깐부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좋아한다”며 ‘깐부 정신’을 강조했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게 깐부 정신이죠. 부모와 자식 간 갈등, 정치적 갈등, 남녀 갈등, 이런 갈등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깐부 정신’이 필요하죠.”
오영수에게 섭외가 왔으나 사양했던 ‘깐부치킨’ 광고에 관해 물었다. “출연한 작품에 맞지 않는 광고라서 사양했죠. 내가 출연한 작품에 맞지 않는 광고에 나와 돈을 버는 게 깐부 정신과도 맞지 않으니까. 연극이나 영화는 좋은 작품이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광고는 소극적이어서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괜찮은 광고 있으면 나가야죠. 근데 요새는 (광고 문의가) 조용합니다. 하하.”
아름다운 삶과의 인연오영수는 수상 소감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평소 “우리말 중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추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했다. “연극이나 영화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이죠. 예쁘고 참한 것만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추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우리가 보는 평범한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게 예술이죠.”
오영수는 참다운 연기를 말하며 아름다움을 얘기하기도 했다. “연극이란 뭘 주장하고 외치고 표현하려는 게 아니에요.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움,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거칠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내는 것이 참다운 연기죠.” 2003년 9월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고 리얼리티가 아니에요. 거기에 미적인 것이 들어가야지”라고 했다.
오영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라고 했지만, 연기 외길을 걷는 그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 같다.
정혁준 <한겨레> 문화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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