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힘이 셌다. 어른들은 그걸 ‘소질’이라고 불렀지만, 평범한 재능이었다.
사직구장의 함성과 탄식으로 하루가 여닫히던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2008년 여름, 5학년이었다. 공터만 있으면 친구들과 공을 던지고 치고 받았다. 낯선 사건은 불쑥 끼어들었다. 점심시간에 ‘야구부 인원 모집’을 한다고 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갔다. 덩치 큰 시커먼 아저씨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야구해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2022 KBO 신인 드래프트 트라이아웃(선수 선발 테스트)에 도전한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 임현준(23) 선수는 9월14일 “그때 그 말이 그냥 좋았다”고 했다. 매일 상상했지만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가 그때 정해졌다.
부모님은 “많이 힘들 텐데 괜찮겠냐”고만 물었다. 선수가 되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정말 몰랐다”. 평범하게 힘이 셌던 소년은 홀린 듯 그렇게 집에서 40분이나 떨어진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야구선수가 됐다. 야구부가 되던 날, 부모님은 검은색 가죽에 갈색 줄이 단단히 매어진 ‘유명 메이커’ 제트 내야 글러브를 사줬다. “하고 싶을 때까진 열심히 밀어줄 테니 열심히 하라”고만 했다. 그때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큰 다짐이고 약속인지. 그저 지금껏 만져왔던 싸구려 글러브들과는 너무 달랐던 글러브의 황홀한 감촉이 좋았다.
매일 좌절했다. 일상이 좌절이었다. 처음엔 날아오는 공을 잡기도 힘들었다. 내가 힘이 세다고 했는데, 정작 힘이 센 건 공이었다. “롯데의 강민호” 같은 포수가 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외야수가 됐다. 포수가 부러워 쳐다보는데 감독님이 물었다. “쟤 이길 수 있겠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습니다.” “하던 것 해라.” 그때부터 쭉 시키는 걸 하는 선수였다. 타격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아 떠밀려 투수가 됐다. “공을 잘 던져서가 아니라 타격이 너무 안 돼서.”
그래도 했다. 꾸준히 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운동은 “재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못하니까, 나는 너무 평범한 선수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하니까. 이유는 많았다. 그게 핑계인지 다짐인지 주문인지 헛갈릴 때는 다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처음 투수로 등판했던 경기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국구로 불리는 선수들이 너끈히 시속 130㎞짜리 공을 던지고 친구들도 120㎞를 던질 때 난 100㎞ 갓 넘는 구속”으로 선수들과 싸웠다. 직구 하나로. “직구, 또 직구, 다시 직구, 이번에도 직구”를 던졌다. 방망이가 돌아가면 안타를 맞았고 포수가 공을 잡으면 스트라이크존 바깥이었다. 아웃 카운트를 잡는 일이 혼미해질 때쯤 이닝이 끝났다. 그래도 그때 “잘했다”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처음치고는”이 붙어 있었지만. “가능성이 있다. 더 열심히 해라”라는 말에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묵묵한 척했다.
그러곤 많이 못 던졌다. 공을 던지면 팔꿈치가 아팠고, 통증을 무릅쓰고 던지면 타자들에게 쭉쭉 맞았다. 타자들이 130㎞ 후반을 팡팡 때릴 때 내 구속은 120㎞ 넘기기가 버거웠다. 그때 왜 그만둔단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 어른이 되어 몇 번 생각해봤다.
“어차피 10년간 평범한 선수였으니”고등학교 1학년 때 계속 문제가 됐던 팔꿈치 수술을 했다. “염증이 나서 곯았고 뼛조각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두려웠다. “한잠 자고 일어나면 말끔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재활은 지루했다. 하지만 그때가 바탕이 됐다.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컸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171㎝였던 키가 재활하는 동안 180㎝까지 자랐다. 던지고 싶단 마음과 던질 수 없는 현실이 술래잡기할 때 처음으로 간절히 “던지고 싶다”고 느꼈다.
필사적으로 던졌지만 구속은 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내내 130㎞ 초반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잡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시합에 못 나갔고, 함께 견뎌온 친구들이 야구를 떠났다. 코치님은 대학 진학을 권했다. ‘롯데의 강민호, 1차 지명, 신인왕…’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품었던 꿈들이 다 떠내려갔지만,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다.
늘 같은 지적을 받았다. ‘중심이동이 안 된다. 신체 조건을 다 활용하지 못하고 상체로만 던진다.’ 항상 들었지만 어떻게 개선하는지 아무도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더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변화는 갑작스럽고 짧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꾸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름도 몰랐던 대학에 진학해 석 달 동안 구속이 130㎞ 초반에서 140㎞ 중반으로 단숨에 올랐다. 특별한 마법은 아니었다. 선수 내내 “에이스급이 아니라 주어지지 않았던 관심”을 처음 누군가에게서 받았다. 중심이동이 안 되는 이유를 파악하고 상체만 쓰는 자세를 정돈하려고 새벽 1~2시까지 작심하고 운동했다. 코치들은 평범한 선수를 비범하게 만들기 위해 성의껏 지도했다.
그 흔한 우승도 못해본, 단 한 번도 팀의 주력 선수인 적이 없던 선수였다. 1회부터 9회까지 불펜에서 몸만 풀다가 가방을 싸서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절망도 온전히 내 것은 아니었던 선수는 구속이 140㎞ 중반으로 올라온 대학교 2학년 때 일본 전지훈련에서 일본 대학팀을 상대로 1이닝을 3구 삼진 3개로 가뿐히 틀어막았다. 늘 마음에 ‘그냥 하자’는 작은 집을 지어놓고 버텼던 소년은 그때 비로소 확신했다. “되겠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을 때까지 밀어주겠다던 부모님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학교를 떠났다. 군대를 현역으로 마치고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 입단했다. 한 달에 90만원 회비를 내고, 작은 빌라에 8명이 함께 살며, 기약 없이 운동했다. “딱 한 번 프로야구 마운드에 서보고 싶어서. 한번은 누군가에게 나 여기 섰노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임현준. 1998년생. 부산 개성고 출신. 185㎝ 102㎏. 우완 사이드암 최고 구속 148㎞. 대학 중퇴 자격으로 선수 선발 무대인 트라이아웃을 거쳐 ‘2022 KBO 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함께 트라이아웃에 도전했던 선수들 가운데서 메이저리그에 갔다가 돌아온 권광민 선수와 순수 비선수 출신 김서진 선수가 프로구단이 지명한 100명 안에 들었다. 임현준 선수는 고배를 마셨다. ‘마지막’ 도전에 나선 임현준의 야구 인생은 일단 쉼표를 찍었다.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리지 못했지만 아직도 신고선수(등록되지 못하고 선수로 신고만 된 선수)가 되길 기다린다.
더 얇은 실낱이 된 그의 꿈은 이뤄질까. 익숙한 성공과 특이한 성공에 바쳐지는 환호 속에서 평범한 이들은 기록도 되지 않는 실패들을 쌓아 세계를 이룬다. 임현준은 실패가 익숙해 오히려 좌절할 수 없고, 그래서 비범하게 마지막까지 매진하는 우리 모두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에게 한번쯤은 더 기회가 주어지길, 그렇게 평범했던 모든 이들이 한번은 존중되길 기원한다.
글 김완 <한겨레> 기자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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