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정지돈①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30.html
memex2. 친절을 가장한 오만함과 오만함을 가장한 배려/ 정지돈과 글쓰기
정지돈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왜 이렇게 쓰느냐’는 질문을 가장 자주 듣는다고 밝혔다. 그래서 물었다. “왜 이렇게 쓰십니까?”
이렇게1.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고 중심인물이 없어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팬텀 이미지>는 100만 번째 한국 관광객 바버라 리 존슨 부인 얘기로 시작한다. 이윽고 100만 번째 관광객 자리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다나카 히데미쓰가 경주 도큐호텔 수영장에서 김신과 대화한다. 다나카 히데미쓰는 모텔을 떠돌며 수영장 청소를 하는 오리건주 출신 남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다가 경주 서출지로 여행하는 정지돈과 그 일행이 등장한다. 이들은 폐쇄된 경주 도큐호텔(콩코드호텔)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그리고 노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원인과 결과가 플롯 안에서 명확하게 있어야만 할 글이나 영화도 있어요. 그런데 명확한 서사가 독자로서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인과를 만든다는 건 작가가 세계를 하나의 틀로 설명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예요. 제가 몇몇 작품에서 하고 싶었던 건 아이디어가 확장되는 경험을 나누는 거였어요. 독자가 분노하거나 도저히 못 읽겠다고 하면 안타깝죠. 어쩔 수 없지만.”
인과와 단문 대신 우연과 리듬
세상을 명료하게 틀 짓는 작가의 전지전능함을 그대로 인정해버리고, 어쩌면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던 소설 읽는 다채로운 기쁨을 작가 손에 내맡겨버린 일이 적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그냥 좀 편하게 읽고 싶어서. 정지돈의 불친절해 보이는 어떤 글(앞서 적었듯 술술 읽히는 글도 많다)은 오히려 독자의 자리를 넓히는(memex3), 그 나름 배려일 수 있겠다. “그렇게 봐주시면 너무 좋죠.”
이렇게2. 긴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여덟 번째 문장은 548자(공백 포함)다.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다. ‘문장은 짧게, 한 문장에는 하나의 아이디어만’ 같은, 글쓰기의 금과옥조(라 여겨온 것들)를 배반한다.
“문장이 끊길 듯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면서 사유나 단어가 계속 결합돼가면서 흐름이 느껴지는 게 좋아요. 문장은 의미를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리듬도 있어서 써나가다 보면 의미와 리듬이 막 섞이거든요. 같은 한국말이라도 다양한 층위의 말법이 있는데 이런 게 뒤섞이면서 생뚱맞은 순간이 나오기도 하고요. 반대로 소설의 문장은 단문으로 적더라도,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여러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3. 실명이 나온다. 정지돈 소설 속 인물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거의 실존 인물의 이름을 쓴다. 작가와 친한 금정연, 오한기, 이상우 작가는 물론이고 신형철, 이성복, 백가흠, 김원, 무함마드 깐수 등 숱한 실명 인물이 등장한다. 다만 이들이 우리가 아는 그들인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작가가 실제 일을 적으면서 가명을 쓰고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말해요. 이 경우 층위가 하나밖에 안 생기죠. 이걸 뒤집어서 실재 인물을 두고 지어낸 이야기 혹은 있었던 이야기를 쓸 때 상상할 수 있는 게 더 다양하고 재밌어져요.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이는 거죠. 예를 들어 건축가 김원 선생님과 제 소설 속 김원은 기표(이름과 직업)만 같을 뿐 다 지어낸 얘기예요. 물론 때때로 실재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도 써요. 다만 그럴 때는 ‘글을 읽는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충족해주기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쓰는 걸까. 정지돈은 스스로 “느리게 쓰고 많이 퇴고하는 편”이라고 했다. 단편 하나를 쓰는 데 3~6개월(때로 그 이상) 정도 걸린다.
“100장짜리 원고를 쓰면 일단 10장을 써요. 그리고 그 10장을 계속 읽다가 뭔가 떠오르면 다시 뒤에 10장을 써요. 이렇게 하다보면 첫 10장은 거의 100번 넘게 읽고 퇴고하게 되죠. 다만 새로 시작될 부분은 제가 전에 이미 생각하던 것이면 안 돼요. 계획을 짜고 소설을 쓰지 않아요. 계획이 나오려고 해도 무너뜨려요. 저한테는 우연성이 중요한데, 그게 또 예상 못했던 방식으로 앞의 글들과 연결돼야 해요. 그게 안 되면 버려야죠. 다시 써야죠.”
우연히 무언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나마 떠오른 게 신통찮으면 소설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두렵고 힘들어요. 우연인데 필연 같기도 한 것이 안 나오면 그냥 이 소설은 완성이 안 되고 영원히 못 쓰는 게 돼버리죠. 근데 이렇게 써야 재밌어서, 안 그러면 그냥 일 같아서요.”
memex3. 연결과 확장을 통해 좋은 사람 되기/ 정지돈과 독자
‘정지돈을 읽는다’는 게 품은 의미는, 그러니까 단순한 허세 이상이다. 웃기기도 저릿하기도 한 이야기의 조각들을 따라가며 몰랐던 인물, 몰랐던 생각을 알게 된다. 인물과 생각은 소설 안, 소설들 사이, 소설 바깥에서 기묘하게 연결된다. 마치 memex, 혹은 노드(정보)와 링크(연결)로 구성된 하이퍼텍스트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를 좀더 풍성하게 즐기려면 이 소설을 설명하는 소설인 ‘존 케이지와의 대화’를 읽으면 좋다. 한 신문에 정지돈은 경주 서출지를 (마치 오래 알던 장소인 양) 내 마음의 안식처라고 소개한 글을 썼다. 소설 <팬텀 이미지>에는 신문사 청탁을 받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어 친구에게 즉흥적으로 추천받은 서출지로 향하는 정지돈이 나온다. 두 정지돈 사이 무엇이 진짜인지, 이런 장난(?)에 담긴 의도는 무엇인지 혼란스럽고, 그래서 짜릿하다.
일종의 ‘정지돈 유니버스’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등장하는 한강 밤섬은 ‘무한의 섬’에서 세계의 대혼돈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는 장소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이구에게 유학 상담을 받던 김원은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에서 자기 의도와 다르게 지어진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을 보며 좌절한다. 이런 연결고리는 “그냥 어쩌다보니” 나타나는 것이지만, 훗날 누군가(어떤 오타쿠 혹은 작가 자신) 우연한 연결고리를 꼼꼼히 찾고, 클릭하면 관련정보로 넘어가는 식으로, 정지돈 유니버스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와, 정말 꿈같은 얘기예요.”
밤섬, 김원, 서출지… 정지돈 유니버스
작가 자신은 ‘정지돈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이길 바랄까. “세계, 예술, 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있다는 의미라면 좋겠어요. 세계는 너무 빨리 변하고 한때 도덕적이라고 했던 386이 가지고 있던 윤리의식이 지금은 뒤처지게 됐잖아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여도 좋을 것 같아요.”
책이 언급한 생각과 사실들, 그 가운데 꽂히는 어떤 것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헤집고, 정지돈의 다른 글과 말을 찾아보며 독자의 세계는 무한히 확장한다. “이 책 한 권을 읽는 게 이야기 하나를 보았다를 넘어 총체적인 경험이라면 좋겠다”고, 또한 작가는 생각한다. 그런 바람으로 책 뒤에 구태여 상당한 분량의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를 담기도 한다. “저는 이게 일이고 즐거우니까 새로운 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쓰고 싶어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깊이 느낄 만한 걸 이 책 덕분에 알 수 있게 된다면 중간에 책을 덮어버린다고 해도 이 책은 충분한 역할을 한 것 같고요.” 그가 최근 관심 가진 분야는 신유물론, 분자생물학, 20세기 중반의 공산주의 등이다.
발굴하고, 연결하고, 확장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완전히 이해는 안 돼도 어딘지 그냥 재밌고 웃기고 짠하므로, 어쨌든 우리는 정지돈을 읽을 것이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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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쟤는 모든 걸 다 냉소하고 거리 두고 이런 식이다. 우습게 만들고.”(정지돈이 들었다는 말) 그런 얘기를 듣고 정지돈은 “충격받았다”고 했다. “평생 살면서 너 왜 이렇게 진지하냐는 소리만 들어왔거든요.” 믿기 어렵지만 등단 전 습작에서 그는 유머를 전혀 담지 않았다고 했다.
진지함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항변했지만 혐의는 짙다. (심지어 영화 전공자인) 그는 진지한 예술영화를 보며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자주 잠이 들며, 대충 발췌독만 한 책을 읽은 척했다고 적곤 했다. “그건 해방감을 주니까요. 꼭 작품을 우상화하고 경직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잖아요.” 호응한다. “맞아요. 작가님은 스스로의 글에 대해서도 그렇잖아요. 절대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생각보다 한발 물러서서 편히 읽어주세요 하는 느낌인 문장들.”
적절한 호응은 아니었나보다. “맞아요. 그런데 제 작품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면 어떡해요. 슬픈 걸 해야 진정성이 있고, 웃긴 걸 해도 페이소스가 담겨 있어야 진정성이 있고, 그런 건가요? 왜 그래야만 하죠? 그래도 어떤 독자들한테 사랑받으려면 진지함을 연기해야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진정성 연기를 해야 하는데.” 갈팡질팡 노심초사한다. 또다시 부적절하게 대꾸한다. “연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기도….” 작가의 표정은 한층 어둡고 진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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