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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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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죽음, 때늦은 슬픔

국가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교수 사회,

이미 오래전 현실은 ‘지사형 지식인’ 나올 수 없는 상황
등록 2019-10-23 11:45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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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이 자연인으로, 법학자로 돌아갔다. 그를 둘러싼 뜨거운 논란은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수많은 균열, 갈등과 선연히 맞물린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옹호해온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공적 행적과 상류계급 일원으로서 개인적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여론의 실망과 분노를 모두 보수의 선동과 검찰의 악의적 수사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절반 가까이는 1억 연봉, 34%는 시간강사

비판은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비판적 지식인 일반으로 향한다. 무명의 서생인 나도 그 비판 앞에 불안해진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의 갈등은 특정 개인에 대한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거시적 변화, 무엇보다 대학이라는 지식생산체제의 변화와 대학교수·지식인의 성격 변화와 관련된 탓이다. 사실 조국이라는 개인에 대한 분노는 이미 끝나버린 변화에 뒤늦은 대중적 확인 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특정 개인에 주목하지 말고, 비판적 지식인 일반, 나아가 지식생산체제 자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대학교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4·19혁명 당시 대학교수의 시위는 상징적이다. 교수는 마땅히 자신의 지식에 기초해 사회 현실에 비판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참여지식인론이, 70년대에 민중적 지식인론이 대두했다. 이 시절 교수지식인의 현실 비판은 민중의 참상에 대한 연민과 학문적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양심은 물론, 자신의 비루한 삶의 조건에서도 기인했다. 시간강사도 가난했지만 교수의 살림살이도 딱히 낫지는 않았다. 학문의 자유도 제약되었지만 연구비 같은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민중을 대변한다는 예언자적 소명의식은 자기 해방의 요청과 동행했다. 존경받는 지사형 지식인의 출현이다.

이들의 소명의식은 80년대를 거치며 더욱 급진화되었다. 신군부 정권이 비판적 교수들을 대거 해직하자, 이들은 곳곳에 재야 연구소를 만들어 정권과 체제에 대한 지적 저항 거점을 구축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과 변혁 탐구를 실천과 결합했다. 젊은 대학원생들은 교수직이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마다하고 재야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만났다. 독립적 지식 생산의 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제도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지식인에 대한 가시적 탄압은 크게 줄어들었다. 마침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이들의 비판 담론도 수위가 낮아졌다. 대학이 팽창하자 재야 연구소의 젊은 연구자 상당수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이 시작되었다. 대학은 갈수록 상업화되었고 등록금은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 그에 힘입어 대학교수는 상위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교육부 자료로 밝힌 바에 따르면 2017년 기준 4년제 대학 절반 가까이에서 교수 연봉이 1억원을 넘었다. 연구활동비 등 각종 부수입은 제외한 수치다. 같은 해 근로자 평균 연봉이 3475만원이었다. 물론 교수 사회도 양극화가 있다. 연봉은 지방에서 서울로 갈수록 높아지고, 교수 직급별 연봉 격차도 확대되었다. 그해 대학교원 중 34%를 차지한 시간강사의 참혹한 처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사회 모순의 축소판이다.

비판적인 시스템의 수혜자

19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대학 경쟁력 강화가 대세가 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신지식인 담론을 퍼뜨리면서 지식의 성격 변화를 요구했다. 대학은 자본 축적에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는 기지가 되어야 했다. 놀고먹는 교수에 대한 공분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학술지만 등재지로 지정되고, 등재지 논문만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재야 연구소들은 대개 학회로 전환하여 제도권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주류가 되었다. 대중을 향해 서점에 깔리던 독립 학술지들은 학회 회원에게만 우송되는 등재지가 되었다. 과장하자면 필자와 심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읽지 않는 잡지가 되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무엇보다 민중을 향한 연구는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비판적 교수지식인 대다수는 독립성을 포기하고 변화에 적응해갔다.

정부와 언론은 대학 평가로 대학을 줄 세우고 서열을 공고화했다.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 수주가 교수의 능력 척도가 되었다. 진보적 교수들이 두 정권 동안 교육부 장관 등 고위 공직에 꽤나 진출했고, 지금 다시 권한을 쥐고 있지만 정부의 대학 정책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제 대학과 교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었다. 또는 스스로 지식권력의 일부가 되었다.

진보적 교수지식인은 대부분 이 흐름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가 녹을 먹는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교수 조국은 대학 서열의 정점 서울대 교수이자 법학 분야 등재지 논문 피인용 횟수 1위의 훌륭한 학자였다. 그도 이 시스템에 비판적이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시스템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시기하는 게 아니다. 오늘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대학교수가 감당해야 할 딜레마의 일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암울하지만 이런 변화는 세계사적 흐름이기도 하다. 19세기에 확산된 유럽의 근대적 대학 모델은 구체제에 맞서던 부르주아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교양시민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진리 탐구를 위한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이상이 거기서 나왔다. 이 모델 아래서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말하는 ‘자유롭게 떠도는 지식인’이 탄생했고,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그람시의 ‘사회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유기적 지식인도 등장했다. 자기 출신 계급에 맞서 실천하는 지식인이 주목받게 된 배경이다. 지난 시기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던 지사형 교수지식인 또한 이 모델 아래서 가능했다. 그 시절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상아탑 모델은 2차 대전을 거치며 미국에서 탄생한 연구중심대학, 산학협력 모델로 대체되었다. 대학은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여 생산력으로 직접 전화하도록 재구조화되었다. 이 지식생산체제는 미국의 지적 헤게모니 아래 확산되었다. 서구에서 ‘지식인의 죽음’이 화두가 된 것은 이미 1960년대의 일이다. 한 일간지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연재한 것이 2007년이니, 서구와 한국의 시차가 그만큼이다.

중상류 계급이 된 비판적 교수지식인

대학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고, 높은 등록금과 서열구조로 오히려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판적 교수지식인은 대개 중상류 계급이 되어 있고, 열심히 연구하고 교육해서 인정받을수록 이 시스템을 강화하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조국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지사형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오랜 믿음이 깨진 데서 나왔겠지만 현실은 한참 전에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이 분노는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이 시스템에 무기력하게 적응해온, 나를 포함한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 일반에 대한 분노라고 읽어야 한다.

대학을 포기하고 바깥에서 새로운 지식 생산 거점들과 유기적 지식인이 등장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어려운 길이다. 물론 예외적 개인은 늘 있는 법이어서 지금도 대학 안에는 훌륭한 지식인이 적지 않다. 그들을 믿어 대학을 공공자산으로 개조하고 비판적 지식인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할까? 어느 방향이든 우리의 논의는 많이 늦었다. 그래서 지금 논쟁해야 한다.

조형근 사회학자·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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