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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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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지우고 책방을 그리다

일본 서점 기행 ③ 카페, 갤러리, 이벤트 공간…

달랑 두 글자의 책방에는 무수한 다양성이 담겨 있다
등록 2019-07-18 10:58 수정 2020-05-03 04:29
‘시부야 퍼블리싱 북 셀러’는 새로운 책방의 모든 아이디어를 실험했던 공간이다. 정재혁

‘시부야 퍼블리싱 북 셀러’는 새로운 책방의 모든 아이디어를 실험했던 공간이다. 정재혁

매주 주말이면 서점 아닌 서점이 있다. 오후 3시부터 밤 9시까지,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책방 ‘비앤드비’(B&B)는 서점 내부에 커다란 가림막을 친다. 정오에 문을 열어 밤 11시에 마치는 이곳의 영업시간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반나절 휴점’인 셈이다. 가림막 외의 공간에는 최소한의 통로만 남아 실제 살 수 있는 책 수는 현격히 적어진다. 2만5천에 가까운 팔로어를 지닌 트위터에서 공지하기는 하지만, 멋모르고 찾았다간 헛걸음하기 십상이다. 이벤트는 신간 발간 기념 행사와 작가와의 대화가 대다수다. 물론 책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자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 파는 일을 팽개치고 이렇게 이벤트에 목매는 서점은 없다. 비앤드비는 서점이 생긴 2012년 7월부터 7년간 이렇게 운영되고 있다.

책 읽든 대화하든 무엇을 하든

2015년 문을 연 도쿄 시나가와의 ‘가이도 북스 앤드 커피’는 여행서 중심의 서점이다. 도쿄 가구라자카의 ‘가모메북스’는 책방 내에 카페 ‘위크엔더스 커피 올 라이트’와 갤러리 ‘온도’를 함께 운영한다. 이렇게 장르를 넘어 확장하는 독특한 콘셉트의 작은 책방이 많다.

실제로 놀랍게도 일본에서 중소 서점이 크게 늘었다. 도쿄상공리서치의 조사 결과, 2016년 조사 대상 전체 서점 1128곳 중 중소 서점이 17.5%를 차지했다. 그중 직원 5명 미만이 일하는 서점은 무려 60%를 넘었다. 북디렉터 소메야 다쿠로가 말했다. “문 닫은 책방은 대부분 200평 정도다. 그에 반해 5평, 10평 책방은 새로 생겨난다. 그만큼 영향은 크지 않지만 책방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모메북스가 2014년 문을 열 때 홍보 문구는 “책뿐만이 아니다”였다. 일본은 지금 ‘책방’의 정의를 새로 내려 그 사용법을 다시 쓰고 있다.

롯폰기의 유료 서점 ‘분키쓰’를 기획했고, 북디렉션 브랜드 ‘유어스 북 스토어’의 디렉터인 소메야 다쿠로가 책방에 대해 말했다. “책방은 달랑 두 글자이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다양성이 담겼다. 캐주얼한 책부터 전문서적까지, 책 하나를 잡아도 그려지는 그림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더욱더 다양한 사용법이 있게 된다.” 입장료 1500엔(약 1만6천원)을 내야 하는 분키쓰는 100여 년의 역사가 있는 일본 전통 커피숍 ‘다방’(喫茶店)을 참조했다. 소메야는 “책을 읽든 대화하든, 무엇을 하든 위화감이 없는 공간이 다방”이라고 했다.

분키쓰는 다섯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책장을 둘러보며 책을 만날 수 있는 선서실(選書室), 잡지를 비롯해 정기적 전시가 열리는 전시실(展示室), 느긋하게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열람실(閲覧室), 회의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연구실(研究室), 그리고 잠깐 쉬거나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끽차실(喫茶室). 단순히 기능적으로 나눈 듯 보여도 이곳의 부점장 하야시 이즈미는 “책과의 만남을 축으로, 다양한 독서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분키쓰가 보유한 장서 3만 권은 모두 ‘원 타이틀, 원 카피’다. 같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다. 책처럼 공간도 다양하다. 딱딱한 의자, 소파, 1인용 조명이 구비된 테이블 좌석, 마음껏 뒹굴 수 있는 곳이 있다. 분키쓰 기획에 참여했던 북디렉터 아루치 가즈키가 말했다. “책을 고르는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싶었다. 나아가 손님들끼리 대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리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키쓰의 1인당 지출액은 보통 서점의 배가 넘는다.

차이로 공존하는 풍경

2014년 도쿄 하쓰다이에 문을 연 ‘후즈쿠에’는 조금 도발적이다. 시간별 요금제를 운영해 ‘책 읽을 수 있는 가게’를 표방한다. 후즈쿠에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동반 입장은 되도록 사양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왔을 때는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주세요, 독서 외의 다른 작업은 할 수 있지만 노트북 사용은 자제해주세요.’ 다소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책방을 연 아쿠쓰 다카시는 이렇게 생각했다. “책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사람이 ‘심하다’고 느낄 만한 규칙은 거의 없다. ‘천천히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충분히 즐겨주세요’라고 말할 뿐이다.”

강조는 배제다. 분키쓰에는 90종의 잡지가 있지만 나 와 같은 대중적 잡지는 없다. 하야시 부점장은 “매일 200권씩 신간이 쏟아지는데, 3만 권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 결정하는 일은 꽤 힘들다”고 말한다. 지난 4월 오사카에서 문을 연 ‘토이북스’는 문예서를 중심으로 책장이 꾸려졌다. 토이북스의 이소가미 다쓰야는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알아차리는 것들, 생각을 깊게 해주는 장르로서 문예서를 떠올렸다”고 했다. 후즈쿠에에는 주인 취향을 따라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압도적으로 많다.

유통 중심 시간에서 이탈하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며, 일본 책방은 책이 가진 리듬의 시간으로 회귀한다. 베스트셀러를 살 수는 없지만 의외의 책이 기다리는 서점. 가끔은 서점 본연의 기능을 지워내고 다시 그려내는 서점. 후즈쿠에의 아쿠쓰는 책을 살 수 없는 자신의 공간에 대해 책방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 지금 일본 책방은 ‘차이로 공존하는 풍경’을 보인다.

‘새로운 책방’은 일본에서 최소 1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책방의 미래상을 그리며 2009년 가을 문을 연 ‘시부야 퍼블리싱 북 셀러’(이하 SPBS)를 기점으로 한다면. SPBS는 ‘출판하는 책방’을 내세우며 출판과 서점, 그리고 잡화점과 이벤트를 겸하는 형태로 탄생했다. 대표 후쿠이 세이타는 경제지 에서 오랜 시간 편집자로 일했고, 이후에도 여러 책을 편집했다. “오래전부터 책방은 마을 중심에서 정보 발신,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기능했다. 마을이 활성화해야 책방의 살길이 열린다. 처음부터 지역 활성화와 서점 운영을 함께 보고 시작했다.” SPBS는 건물 정면 큰 창에서 서점 내부뿐 아니라 안쪽 사무실까지 보인다. 최근 화제가 된 잡화점이자 서점인 ‘코워킹스페이스’, 토크 이벤트, 전시 등 거의 모든 새로운 책방의 아이디어가 여기에서 시작됐다.

직원 10여 명 중 편집 인력을 활용해 주변 가게들을 취재해 기사를 쓰기도 한다. “출판하는 책방은 예전부터 있었던 형태다. 에도시대에는 책을 만든 곳에서 책을 팔았다. 언젠가부터 둘이 나뉘었다. SPBS에선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을 한다.” 후쿠이 대표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유명 작가가 단 하나의 서점을 위해, 1천 부만 찍는 걸 꿈꿨다”고도 말했다. 과거를 꿈꾸는 이상한 오늘이 흘러가는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10년이 걸려도 사줄 만한 책을…”

지난 6월 비앤드비는 대만의 ‘유한 책임 우호 출판 공급 합작사’에 합류했다. 대만 독립서점 150곳이 참여하는 유통 단체다. 이곳에 가입한 서점들은 정가의 70% 가격으로 책을 도매하고, 대만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책을 배송하는 데 드는 비용을 대만 정부가 보조한다. 여기에 비앤드비가 일본 서점으로는 최초로 참여했다. 비앤드비 대표 우치누마 신타로는 다른 동아시아 나라의 유통 시스템을 참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거대 유통업체를 벗어나 새 질서를 만드려는 움직임이다. 우치누마 대표는 등을 연이어 펴낸 1세대 북디렉터다. 지금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책방의 내일을 모색하는 인물이다. 지난해 11월 전문을 인터넷에 무료 공개하기도 했다.

일본에선 거대 유통회사의 임의 배본을 거부하는 작은 책방이 늘어나고 있다. 도쿄의 ‘다바북스’와 분키쓰를 비롯해 후즈쿠에와 오사카의 토이북스처럼 개인의 취향에서 시작되는 서점에서 거대 유통업체의 배본은 이미 실질적 의미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100% 자체 배본으로 운영되는 도쿄 긴자의 ‘리딩 라이팅 북스토어’의 점장 오치아이 히로는 웹진 (Wotopi)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품이 불가능하다. 안 팔리면 반품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할 수 없다. 유통에 좌우되지 않고, 5년이든 10년이든 손님이 사줄 만한 책을 들여놓는 게 기준이다.” 실제 그곳의 손익은 유통업체의 임의 배본에 의지하던 때보다 좋아졌다.

지금 일본 책방은 가장 책방답기도 하고 가장 책방답지 않기도 하다. 후즈쿠에는 1200여 권의 책이 있지만 운영자의 말대로 책방이 아니고, 신주쿠와 이케부쿠로를 비롯해 일본 전역에 6개 점포가 있는 ‘북앤드베드’는 서점이 아닌 숙박업소로 등록됐다. 1만2천 권으로 온천 관광지 하코네에 문을 열어 화제를 모은 ‘하코네 혼바코’는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책방으로 리조트에 가깝다.

최대한 다양한 가치를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이러한 변화는 SPBS가 시작일 수도 있고, 비앤드비가 시작이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앞서 1983년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으로 나타난 시시시(CCC)그룹의 자회사 ‘쓰타야’가 시작일 수도 있다. 책방을 지우고 책방을 그리고 책방이 아닌 곳에 책의 자리를 만들고 책이 책방을 넘어 자리를 차지한다. “서점은 도시의 다양성을 압축한, 공간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다양한 가치를 끌어들인 곳”(우치누마 신타로, 컬처 포털 ‘카이 유’ 인터뷰)이다. 이렇게 책방은 커피를 마시고 먹고 자는 것처럼 다양한 곳이다. 책방은 우리 일상과 가까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수많은 책의 모습처럼, 다양하게.

도쿄(일본)=글·사진 정재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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