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책방을 체험하다
② 지역을 살리다
③ 오래된 미래를 보다
④ 다양성의 서점으로
독립출판 제작자이자 ‘51페이지’ 책방지기 김현경(왼쪽)씨와 ‘지구불시착’ 책방지기 김택수씨.
모든 인연의 시작은 불시착이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오피스텔 건물 2층에 있는 ‘지구불시착’. 법무사 사무실, 편의점 등이 있는 곳에 생뚱맞게 동네책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곳은 기성 출판 시장에서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창작물로 채워져 있다. 일반인이 직접 기획하고, 쓰고, 편집해 만든 독립출판물을 파는 독립책방이다. 지난 11월21일 은 이곳에서 책방지기 김택수(46)씨와 독립출판 제작자이자 ‘51페이지’ 책방지기 김현경(25)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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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책방 안 조명 때문일까, 서점 E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선인 것 같다, 고 나는 그날에도 생각했다(갈 때마다 생각한다). 아마도 어떤 이유로 우주선이 망가졌고 지구에, 하필이면 서울 공릉동에 불시착했고 우주선을 다 고치면 그 즉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고 나는 그날도 책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상상했던 것이다.”( 중에서)
10평 남짓한 지구불시착 공간에 독립출판물 5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등 책은 각자 개성을 드러내듯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책의 내용은 기존 틀로는 담아내기도, 읽어내기도 어려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에 대한 것이다. 이 독립출판물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받지 않았기에, 정식 출간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는 찾기 어렵다. 김택수씨는 “지난번 창전동에 있는 독립책방 ‘이후북스’에 갔는데 그곳 책은 낮잠 자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우리 책들은 다들 ‘나 좀 보라’고 투쟁하는 것 같다(웃음)”고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김현경씨는 책방 지구불시착에 대해 “와글와글한 분위기의 (김택수) 사장님의 그림 같다”고 표현했다. 책방 벽면에는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하는 김택수씨가 그린 서재, 도시의 모습, 고양이 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같은 동네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김택수씨와 김현경씨가 처음 만난 건 지난해 9월이다. 그때에는 책방 주인과 독립출판 제작자의 관계였다. 김현경씨는 자신이 만든 책을 입고하기 위해 지구불시착에 왔다. 당시 책방에 쭈뼛쭈뼛 들어온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줘서 무척 고마웠단다. 그 뒤 이곳은 그의 중요한 거래처이자 단골 책방이 됐다. 김현경씨는 “독립출판이라는 게 혼자 모든 걸 하는 일이라 지치기 쉽다. 그럴 때 이곳에 오면 쉴 수 있고, 독립출판을 계속할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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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책방 ‘지구불시착’에는 창작자들의 개성과 철학이 담긴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가득하다.
책방 한쪽 벽면에 어느 독립출판 제작자가 쓴 손편지가 붙어 있다. ‘부산에 내려간다고 수다를 떨던 그날 즐거웠고 재입고 감사하다. 세상 최고의 반가운 소식이다.’ 자신도 독립출판물을 입고하기 위해 다른 책방을 찾아다녔다는 김택수씨 역시 그들의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이해한다. 그래서 낯선 책방에 들어서는 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단다.
독립출판 제작자는 자신이 만든 책을 팔기 위해 동네책방에 입고 신청서를 보낸다. 입고 승낙을 받으면 책을 들고 책방에 간다. 책 제작부터 판매와 영업까지 그들의 몫이다. 그래서 독립출판 제작자들은 인터넷으로 책을 쉽게 사고파는 시대에 자신들을 일컬어 “21세기 보부상”이라고도 말한다. 김현경씨도 전동킥보드에 책 20∼30권을 주렁주렁 매달고 합정동에서 연남동까지 책 배달을 했다.
그는 지난해 말 이곳에서 다른 독립출판 제작자 의 김종완씨, 의 김봉철씨도 만났다. “낯을 가린다”는 그들과 책방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처음 만났지만 말이 통했다. 그 인연을 계기로 출판 계획까지 함께 짰다. 지난해 동네책방 방문기 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는 세 제작자가 찾아간 동네책방에 대한 느낌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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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불시착처럼 독립출판물만 전문으로 파는 독립책방은 서울에만 80여 곳이 있다. 대형 서점과 다른 모습과 비주류성 등의 매력 때문에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게다가 독립출판 제작자에게 독립책방은 더없이 소중한 소통의 플랫폼이다.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 책을 만드는 섬과 같은 그들을 이어준다. “책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사람들이 책 제작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계속 굴러간다. 김현경씨처럼 다른 제작자와 책을 만들기도 하고 우리 책방에서 독립출판 강의를 하기도 한다.”(김택수씨)
지구불시착이 불시착한 공릉동은 서울 안의 베드타운이라는 느낌이 강한 곳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지나는 경춘선 폐철길을 활용한 숲길 공원이 생기면서 ‘공트럴파크’(공릉동의 센트럴파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공원이 생긴 뒤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이곳에서 마을 축제 등 행사도 자주 열린다. 김택수씨는 “이곳은 마을 공동체가 잘돼 있어 다양한 마을 행사를 한다. 마을 사람들이 동네 투어를 하는데 우리 책방도 여행의 한 코스로 넣었다. 그 덕에 이곳을 모르던 주민들이 찾아오고 여기에 책방이 있다고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책 사는 손님이 좋은 손님”김현경씨는 한 달 전부터 공릉동에 있는 책방 ‘51페이지’를 맡게 됐다. 전 운영자가 다른 일을 하게 돼 갑자기 제안받고 책방을 인수하게 됐다. 아직 ‘책방지기’라는 직함이 어색하다. “여러 책방에 가서 커피를 얻어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오는 것”이 취미였던 그는, 이제 하루종일 나만의 책방에 머문다. 그의 목표는 “적자만 안 나게 운영하는 것”이다.
“오늘 손님이 몇 명 올까?”
“책 택배가 먼저 올까, 손님이 먼저 올까?”
두 책방지기는 기다림으로 하루를 보낸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한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시간이지만, 이들은 책방에 있는 게 행복하다. “책이라는 물성이 좋고 책 읽는 사람을 보는 것”도 좋아서다. 손님들 중에서도 유독 책 읽는 모습이 멋진 ‘책 간지’가 나는 분도 있단다.
김택수씨는 “예전에 책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분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스타그램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지금은 우리 책방의 책 모임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책방을 꾸려나가야 하니 책을 사는 사람이 제일 좋단다. 그 말에 김현경씨도 “나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독립책방 지구불시착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20∼30대 젊은층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를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아 이곳을 알고 찾는 독립출판물 마니아가 많다. 김택수씨는 “‘나도 책을 만들고 싶다’는 창작 의지가 있는 분들이 책방에 온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을 휴대전화로 찍어 간다”고 말했다.
김현경씨는 책방에서 독립출판물 제작 강의를 하며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을 만났다. “출판 강의를 들으러 오는 분들이 대학생부터 40대까지 연령이 다양하다. 그분들은 시를 쓰거나 자기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그런 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공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수강생들은 자신이 쓴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것보다 인쇄물로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든 책이 서점에 진열되고 팔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동시대 고민에 대한 느슨한 연대김택수씨는 “지금은 문학상 등단, 기성 출판사를 통한 출간 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자기 손으로 책을 만드는 시대”라고 말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목소리를 담는 독립출판물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그것에 대한 다른 이들의 공감과 느슨한 연대가 일어나는 공간이 독립책방이다. 지구불시착은 그렇게 무언가를 창작하는 이들이 지구에 ‘완전 정착’하는 날을 꿈꾼다.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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