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조차 오해였던 첫사랑

수지에게도 그 시절은 과연 아름다웠을까

첫사랑 기억 깨우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첫사랑을 앞세워 ‘기억’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작이다. 첫사랑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기억 하는 게 아니라, 유리하게 왜곡해 기억한다. 미디어소프트 제공

조심하시라. 당신도 이 영화를 본다면 손가락이 뻐근해져 몰래 마디마디 누를지 모른다. 애무하던 손길을 거둬 가락마다 펴주던 옛사랑이 떠올라 손을 주무르던 주인공 토니(짐 브로드벤트)처럼. 어설픈 시절, 조심스레 묻어뒀던 첫사랑은 삶의 마디로 남는다. 영화 는 그 마디를 섬세하게 자극하는 수작이다.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2012년 가장 뛰어난 외국소설로 꼽히기도 한 동명 소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감각의 마디를 자극하는 수작
백발의 노인 토니는 영국 런던에서 빈티지 카메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까마득히 잊었던 사라(에밀리 모티머)의 부고다. 사라는 첫사랑 베로니카(프레야 메이버)의 어머니. 그리고 사라가 토니 앞으로 과거 절친 아드리안(조 알윈)의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긴 것도 알게 된다. 토니는 그 일기장을 받기 위해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옛 기억을 환기한다.
토니는 친구처럼 지내는 이혼한 아내와 딸에게 시인을 꿈꾸던 고교 시절에 대해 시시콜콜 들려준다. 베로니카에게 첫눈에 반한 순간, 인적 드문 강가의 차 안에서 서로를 조심스럽게 탐하던 숨결, ‘베로니카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라’던 사라의 친절함, 선생조차 대적 못할 정도로 총명하던 아드리안과의 우정. 그리고 아드리안과 베로니카가 눈 맞고 그 분노가 채 봉합되기 전에 아드리안이 갑자기 자살한 사연까지.
불편한 감정으로 헤어졌지만 노년의 토니에게는 좋은 추억. 무엇보다 베로니카를 다시 만날 기대감이 앞선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베로니카(샬럿 램플링)와 재회한다. 하지만 토니가 마주한 건 베로니카의 냉랭한 태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수록 마주하는 끔찍한 진실이다. 토니는 그 진실 앞에 혼란에 빠지고 베로니카와의 관계도 위기로 치닫는다.

기억이 아름다울수록 끔찍한 진실
이 영화는 첫사랑을 앞세워 ‘기억’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에선 추억을 담는 도구인 사진·기념품·기록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어떤 것도 사실을 완벽히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유리하게 왜곡해 기억하기 때문이다. 왜곡된 사실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배반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즉, 우리는 기억의 주체가 아니라 왜곡의 주체임을 드러낸다. 이것이 가 첫사랑을 다룬 영화 이나 과 다른 지점이다. 첫사랑과 해후해 오해를 푸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조차 오해였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첫사랑의 아련함과 설렘, 순수함을 매력적으로 그려줄 거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리테시 바트라 감독은 에서 보여준 감각적인 연출 능력을 십분 살려 아리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곳곳에 정성스레 심어놓았다. 그중 한 장면. 왜 첫사랑들은 의 수지가 그랬던 것처럼, 항상 난간에 나란히 서서 이어폰을 건네주는지 이해할 수 있다. 떨리는 속눈썹, 반쯤 드러나 알 듯 말 듯한 표정, 위태로운 난간, 그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칼, 그리고 그 순간 귀에 꽂히는 음악. 하지만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첫사랑의 기억이 아름답게 그려질수록 진실은 끔찍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처럼 내 첫사랑이 너에게도 첫사랑이었다며 격정적으로 기억을 포개는 판타지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의 간극을 펼쳐 관객의 기대를 아찔하게 추락시키는 극사실 장르다. 첫사랑의 실패가 외부 장애물 탓이 아니라, 사실은 내 탓이었음을 아프도록 환기한다(이 때문에 토니의 성격이 의아할 정도로 괴팍하게 설정된 것일지 모른다). 대신 토니는 이 아픔 덕에 인생의 늘그막에나마 후회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운다.
관객은 비록 첫사랑 판타지가 부서지더라도, 기억의 본질에서 나아가 사랑의 본질까지 깨닫게 될 것이다. 불가해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의 한계,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 점에서 는 의 수지 관점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토니가 겪었던 것처럼, 당신이 은밀히 봉인해둔 기억을 뜯어내 연체된 진실을 청구서처럼 들이민다. 외면하고 싶어도 몸 어딘가의 뻐근함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토니가 고교 시절 기억으로 주름진 손을 주무르는 것은, 단지 시간이 흘렀다고 방치된 진실이 저절로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사라의 부고 편지를 받고도 바로 뜯지 않았던 토니의 모습은 옛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아껴 읽고픈 심리를 보여준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삶은 충분히 과거를 아껴두었다가, 적당한 때 기억의 편지를 부친다. 이 영화도 당신에게 방치했던 옛 기억을 부쳐준다.

옛 기억에 빙의되다
는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서늘한 뒷맛을 남긴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과거를 자극해 당신을 습격하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 충격적 반전은 더욱 치명적이다. 옛 기억에 씔 각오 하시길. 그것은 오래도록 당신을 뻐근하게 할 것이다.
도우리 교육연수생

영화의 흥미로운 뒷얘기. 노년의 베로니카를 연기한 샬럿 램플링은 2년 전 영화 에서 남편의 첫사랑앓이로 고통받는 아내를 연기했다. 에선 정반대로 자신이 첫사랑의 당사자가 돼 남자에게 비수를 꽂는다. 램플링은 연기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전미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은 물론 아카데미상에서도 여우주연 후보로 오르는 등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큰 찬사를 받았다. 램플링의 연기 변신을 유념하며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잔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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