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웃기는’ 기사가 아니었다. 11월15일 JTBC 의 단독 기사(대통령, 차움 시설 무상 이용… 가명은 ‘길라임’)는 박근혜 대통령이 유명 미용 병원을 이용하면서 박근혜라는 실명이 아닌 차명을 사용했고, 매회 이용료 30만~40만원을 내지 않는 등 공인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의료기관 이용 행태를 보였다는 점, 즉 ‘차명 진료’와 ‘외상 진료’를 일삼은 데 대한 고발이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차명 진료’를 지속했다는 의혹이 있어 국정 농단의 자장이 의료 분야까지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꽤 ‘엄중한’ 기사였던 것이다. 원래는….
하지만 분노를 부르는 무수한 분야의 국정 농단 기사와 달리 ‘길라임 기사’는 국민을 웃겼다. “엄중하게 보도하신 아나운서님 칭찬해드려야” “뉴스가 개콘보다 웃기다” “뉴스냐 예능이냐” “태어나서 사십 평생 본 뉴스 중에 젤 웃겼다” “가명으로 실검 1위 중인 각하” “역대 최고 웃긴 대통령” “국민들을 다 웃겨 죽일 셈이냐” “우리 대통령 이름은 가라임” “하다하다 내 배꼽까지 도둑질을 한다” “기사 내일 터졌으면 어쩔 뻔. 수능인데 웃겨서 잠도 못 자고” “대통령에 ‘연구대상’을” 등등 수천 건의 댓글에 폭소가 넘실거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길라임씨, 이게 최순입니까? 확siri해요?”</font></font>
박근혜 대통령이 병원에서 썼다는 가명 ‘길라임’은 드라마 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은 2010년 11월13일 방송을 시작해 2011년 1월16일 종영한 20부작 드라마로 여주인공은 하지원, 남주인공은 현빈이 연기했다. 최고 시청률이 35.2%에 달했으니 국민 3명 가운데 1명은 시청했다는 뜻이고, 그중에 박근혜 대통령도 있었다는 얘기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국정 농단의 지질한 실체가 까발려지는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애정하는 드라마가 드러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드라마 애청자, 드라마 덕후 ‘드덕’이라는 사실마저 알아버린 것이다.
보도 다음날인 11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이 길라임인지, 길라임이 박근혜 대통령인지 모르게 둘이 하나 되는 ‘박근혜+길라임=근라임’ 패러디가 쏟아졌다. 국민 혈세로 세비 받는 국회의원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일편단심을 고백하는 활동 이외의 공식 활동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이정현+현빈=이정현빈’이 됐다.
근라임적으로 해석된 의 명대사들도 “길라임씨, 이게 최순입니까? 확siri해요?”(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어떻게 내 손에 촛불을 들려 이 어메이징한 여자야”(어떻게 내 손에 꽃을 들려 이 어메이징한 여자야), “길라임씨는 언제부터 혼이 비정상이었나?”(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로 번역돼 사람들을 웃겼다.
이날 정청래 전 의원은 △조·중·동-한겨레·경향 논조 통일 △95% 국민 대동단결 등 ‘박근혜 대통령의 살신성인 업적’에 ‘패러디 산업 개척’을 추가했다. 또 이날 JTBC 의 시청률은 9%(닐슨코리아)로 전날 시청률 7.3%를 훌쩍 넘었다. 당일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시청률 1등 가 6.7%였다. 11월13일 시청률은 10.9%였다.
‘길라임 가명 박근혜 대통령, 현빈에 대통령 표창… 역대급 팬조공?’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배우 현빈이 2013년 10월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실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지난해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모 헌시를 낭송한 배경에 ‘팬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우스개가 횡행한다는 것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15년 현빈의 현충일 추념식 참여도 다시 화제</font></font>대다수 국정을 사유화한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나는 ‘국정 농단’의 시국에서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어 팩트체크를 해봤다. 저축의 날(올해부터 ‘금융의 날’로 명칭 바뀜)에는 이전 대통령 때부터 연예인 1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아온 사실을 확인했다. 현충일 추념식 추모 헌시 낭송의 경우 2013년 배우 김혜자, 2014년 배우 최불암에 이어 2015년 현빈이 추모 헌시를 낭송했으며 올해는 배우 이서진이 헌시 낭송에 나섰다.
2011년 12월 MBN과 인터뷰에서 공군 출신 조인성, 해병대 출신 현빈, 육군 출신 비 가운데 누가 좋으냐는 질문에 박 대통령이 “세 사람 다 좋아하면 안 되나. 글쎄, 뭐 다 좋지만 해병대에 가 있는 현빈씨(가 가장 좋다)라고 하겠다”고 밝힌 동영상이 마치 증거처럼 인터넷상에서 폭발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지난 4년 동안 멀게만 느껴진 대통령의 말씀과 행보, 그리고 1천 조각짜리 퍼즐만큼이나 맞추기 어려운 ‘사람 박근혜’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이뤄지는 공감의 국면인 것이다.
하지만 ‘드덕’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공감은 전무하다. 비정상적인 ‘가명 진료’에 자신들이 좋아했던 배역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대한 불쾌감보다 국정 농단 국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드라마 애호와 공무 수행 사이에 우선순위가 전복됐을 수 있다는 의혹(?)이 크다.
을 즐겨 봤다는 한 40대 주부는 “저녁 8시 이후에는 텔레비전을 주로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게, 그 시간은 전업주부도 업무시간이다. 전업주부도 밤 10시부터 드라마를 챙겨보려면 정말 바쁘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본방을 못 보고 돈 내고 다시보기 할 수 있는 휴대전화 앱을 이용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본방 사수를 한다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의 여러 정황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말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마뜩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에서 길라임은 김주원과 영혼이 뒤바뀌는데 ‘혼’은 박근혜 대통령이 제조한 유행어다. 길라임의 직업이 스턴트우먼으로 주로 위험한 장면을 주연배우 대신 찍는 ‘대역’이라는 점에서는 ‘소름 끼친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박근혜와 길라임 ‘평행이론’ 해석까지</font></font>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에는 이번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사에 비춰볼 때 그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다. 의로운 아버지의 죽음, 홀로 남겨진 꿋꿋한 딸, 대역 배우의 삶, 왕자님이 나타나고 그와 혼이 바뀌는 서사에 몰입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시국이 이렇다보니, 거리두기가 이뤄지는 일반인들과 달리 정말 자신을 길라임으로 동일시해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채 드라마만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게 문제다. 요즘 ‘드덕’들은 할 일 안 하고 덕질만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여가시간에 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인터뷰에서 말할 정도로 이름난 ‘드덕’이지만 대통령으로서 할 일을 하니까, 오히려 매력적인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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