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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이 바꾼 것

사전심의에 저항하며 앨범 ‘불법’ 제작… 음악계 ‘표현의 자유’를 빚지다
등록 2016-07-29 17:16 수정 2020-05-03 04:28
여전히 방송출연 거부하는 가수 정태춘씨(왼쪽).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 저항해 ‘불법’으로 제작한 정태춘의 일곱 번째 앨범 <아, 대한민국…>. 정용일 기자, 매니아DB

여전히 방송출연 거부하는 가수 정태춘씨(왼쪽).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 저항해 ‘불법’으로 제작한 정태춘의 일곱 번째 앨범 <아, 대한민국…>. 정용일 기자, 매니아DB

‘번민’이란 낱말이 이상한가? 불온한가? 반체제적인가?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낱말 하나하나에 벌벌 떨던 시절이 있었다. 벌벌 떨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절의 위정자들은 ‘탈춤’에도, ‘고독’에도, ‘방황’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번민은 사색으로 바뀌어야 했고, ‘탈춤의 장단’은 ‘생명의 장단’으로,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뀌었다. 정태춘이 청춘의 시절에 쓴 노래 은 그렇게 난도질당했다.

은 정태춘의 첫 앨범 (1978)의 표제곡이었다. 정태춘과 심의의 구원(舊怨)은 첫 앨범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연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사전심의란 괴물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시영 아파트’를 ‘후미진 아파트’로, “서울 변두리 검은 하천엔 썩은 물만 흐르고/ 역한 냄새 속에서 웃지도 않고 노는 애들”이란 가사를 “서울 변두리 학교 앞에는 앳된 병아리를 팔고/ 비닐봉지에 사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애들”로 바꾸지 않고서는 노래를 발표할 수 없었다. ‘미군 부대’가 등장하는 노래는 아예 그 말이 들어있는 절(節) 하나를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낱말 몇 개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창작자가 심의를 의식해 본래 의도와는 다른 노랫말을 쓰는 경우가 생겨났다.

한국공연윤리위원회심의필작품. 오래된 음반의 뒷면에는 어김없이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풀어쓰자면 문화공보부 산하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각 노래 옆에는 심의번호가 적혀 있었다. 모든 문제의 시작에는 이 심의번호가 있었다. 이 번호 없이는 노래를 발표할 수 없었고 방송에도 소개될 수 없었다. 더 순화된 표현을 써야 했고, 혹시라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까 미리 알아서 고치는 경우도 많았다.

음악가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아니면 음악을 그만두거나. 물론 대부분은 순응했다. 대부분이란 말을 빼도 좋다. 실제 사전심의에 저항한 가수는 그때까지 정태춘이 유일했다. 정태춘은 자신의 일곱 번째 앨범 (1990)을 공윤의 심의를 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제작했다. 음반은 카세트테이프로만 제작돼 음반점이 아닌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판매됐다. 2년 이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현행법에 정태춘은 위헌법률심판제청으로 맞섰다.

정태춘의 외롭고 지난한 싸움은 1996년이 돼서야 끝났다. 1933년 일제가 ‘레코드 단속 규칙’을 만들며 시작됐다는 사전심의의 악습이 63년 만에 끝난 것이다. 너무 늦게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상징적으로 그로부터 석 달 뒤 패닉의 두 번째 앨범 이 발표됐다. 패닉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앨범이지만 정태춘의 행동이 없었다면 은 아예 빛을 보지 못했거나 적당히 타협하고 얼버무려져 공개됐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는 인디 동네나 힙합 동네 역시 그 빚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올해는 사전심의제도가 사라진 지 20년 되는 해다. 주인공은 여전히 시대와 불화하며 방송에 모습을 보이길 거부하지만 정태춘이라는 이름과 20여 년 전의 행동을 기억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보통 ‘세상을 바꾼 노래’라거나 ‘세상을 바꾼 아티스트’ 같은 표현은 수사에 가깝지만, 정태춘과 그의 노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었다.

김학선 음악평론가*김학선 평론가의 음악 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김학선 평론가와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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