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민중미술의 오늘 김정헌의 생각을 묻다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지낸 김정헌의 12년 만의 개인전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 “오늘날 검열 방식은 더 교묘해져”
등록 2016-03-26 22:42 수정 2020-05-03 04:28
김정헌은 민중미술의 핵심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민중미술이란 장르 규정 자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용일 기자

김정헌은 민중미술의 핵심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민중미술이란 장르 규정 자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용일 기자

‘민중미술’은 한국의 고유명사이다. 1980년대 한국 미술인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성향, 반독제·반체제적 미술운동을 통칭한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견이다.

물론 1980년대 민중미술의 현장은 치열했고, 1990년대 중반 민중미술을 재조명하는 전시와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2000년대 들어 활발해진 공동체미술의 뿌리를 민중미술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필자에게 가장 와닿는 논의는, 박찬경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다.

“미술이라는 매체 자체가 대중과의 소통에서 인쇄·영상 매체에 비해 밀릴뿐더러, 저항성 역시 서태지 히트곡 하나가 미술계 전체의 저항성보다 크면 컸지 적지는 않다. 대중과의 소통, 현실의 변혁 같은 것을 미술의 역할로 상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현실 비판이 개입된 컴퓨터게임 소프트웨어나 록그룹을 만드는 게 낫다.” - 310쪽, ‘대담: 김정헌 작품론’ 가운데

“민중미술 작품이 약하지 않았나?”

이런 냉소야말로 소수의견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민중미술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직관적으로 어떤 심상이 떠오르나? 내부 텍스트를 상기하면 ‘불온함’, 외부 운동 측면에서 상기하면 ‘탄압’ ‘검열’ ‘투쟁’ ‘저항’ 등의 단어가 떠오를 수 있다.

한편 민중미술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관통한 민중미술 작가들은, 민중미술에 대한 감정을 ‘거부감’(!), ‘착잡’이라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다수자/소수자 담론보다 더 큰 참패다. 어느 단어 하나 경쾌하고 산뜻한 것이 없다.

사뿐하지 못하다고 미리 고백했으니, 아예 민중미술 내부로 밀착하여 ‘칙칙한’ 해체 보수 작업을 시작할까 한다. 방법은 김정헌 작가와의 대담을 통해서다. 민중미술 대표작가 김정헌 작가의 12년 만의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다.

전시와 작품에 대한 언급은 잠시 뒤로 미루고, 김정헌의 작가적 삶을 먼저 들여다보자. 이것 역시 민중미술을 이해하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함이다. 개인의 흑역사가 언급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민중미술 작가들은 그들이 제창한 슬로건-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야 했다.

김정헌 작가가 민중미술의 핵심 작가로 언급되는 이유는, ,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던 이력 때문이다. 은 서구 미학에서 탈피해 우리 민족미술에서 미학의 근원을 찾자는 취지로 창립된 동인지이고, 그는 창립멤버였다. 민미협은 1985년 본격적인 정부의 예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다.

그는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자진 사퇴 압력에 시달렸고, 2009년 경질됐다. 한 지붕 아래 두 명의 위원장이 출근해야 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후 문래예술창작소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조직해 마을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였고, 마을운동을 주도했다.

“미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너무 나이브하지 않나요?”라는 박찬경 평론가의 냉소를 유보하더라도, 민중미술에 대한 온정주의 꺼풀을 벗어나는 작업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따른 질문들이 던져져야 한다.

민중미술의 작품 자체에 집중했을 때, 퍼포먼스가 약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1980년대 민중미술은 거칠고 가난했다. 내 초기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영욱 평론가가 ‘텁텁하다’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농부와 민중의 삶, 땅을 주제로 했는데, 미완성적 작품이 많았고, 심각하고 무게잡기보다는 농담이 섞여 있었다. ‘미술이라는 것이 뭔가?’ 질문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고급문화 화풍을 조롱하고 위악을 떨어보고 싶었다.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했을 때, 지배층이 아닌 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각매체가 민중미술이었고, 그 사람들의 감성을 대변한 미술을 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민중미술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일단은 민중미술 작가군을 작품 평가 대상으로 보는 걸 거부한다. 나 역시 내가 민중미술 작가로 불리는 게 거북하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무겁고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민미협 대표였던 주재환 작가를 보면 조롱과 유희, 가벼움과 심오함을 거의 무당 줄타기 수준으로 가지고 논다.”

상업화랑에서 개인전 하지 않는 이유후기 민중미술이 변질되면서 정치의 도구화로 전락했다는 의견이 있다.

“일단 민중미술을 장르로 규정하는 데 반대한다. 이건 장르로 볼 게 아니다. 민미협은 정부가 본격적으로 작가들을 탄압하고 검열하니까 여기에 저항하는 하나의 단체를 만든 거고, 그 단체 소속 작가들을 민중작가라고 불렀지만, 개인 작업을 하는 데 민족이나 민중을 못박은 작가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예술은 자유로운 건데, 민중이나 민족이라는 테마로 예속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리고 단체를 만든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제도를 형성한 것이니, 변질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민중미술이 최근 다시 활발히 조망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정헌 작가를 비롯해 주재환, 박불똥 등 민중미술 원로작가들의 작품을 조망하는 전시가 속속 열리고 있다. ‘민중미술의 원년’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1970~80년 민중미술과 함께 한국 화단의 주류였던 단색화 전시 열풍도 함께 불고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화풍의 반대급부로 시작된 것이 민중미술인데,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민중미술이 다시 조망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단순히 옛날 것 꺼내와서 탈탈 털지 말고,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지 제대로 조명해봐야 한다. 근데 상업화랑에서 어디 그렇게 하기가 쉽나? 그래도 민중미술이 이제 와 자본주의의 알리바이로 가면 안 된다. 이번 개인전을 하면서 상업화랑이 아닌 아트스페이스 풀을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중미술의 명맥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가?

“민중미술이 시작된 것도, 수모를 당한 것도 검열과 탄압이다. 그때 민미협 활동 작가들은 요주의 검열 대상이었다. 신학철 작가의 작품 (1987)는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로 재판받아 아직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압수물 보관창고에서 무기징역을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검열이 남아 있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고 본다. 다만 방식이 더 진화했고 교묘해졌다. 예전에는 작가들이 노골적으로 저항했는데, 요즘에는 하도 많으니까, 예술가들의 자기검열도 생겨서, 이제는 스스로 그런 얘기들을 잘 안 하려고 한다.”

국가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김정헌은 ‘국가의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희망도 슬프다>는 작품을 내놓았다. 아트스페이스 풀 제공

김정헌은 ‘국가의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희망도 슬프다>는 작품을 내놓았다. 아트스페이스 풀 제공

이번 전시는 12년 만의 첫 개인전으로 주목받았다. 2004년 을 전시하고 난 뒤, 기관장 사퇴 사건을 거쳐, 마을운동에 주력하면서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최근 경기도 가평에 작은 화실을 마련하면서 화집 출간을 위해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린 근작들을 중심으로 한 이 전시는 ‘대안공간 풀’ 키드, 이영욱, 황세준, 김미정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아트스페이스 풀은 ‘대안공간 풀’의 2세대 공간이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민중미술은 어딘가 심각하고 무게를 잡아야 할 것 같은 선입견이 깨진다. 피식피식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그 웃음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라는 작품이 있다. 캔버스에 중절모 두 개가 있다. 첫 번째 모자에는 “리승만의 모자는 하나다”라고 되어 있다. 두 번째 모자에는 “이승만의 모자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작가는 르네 마그리트의 (Ceci n’est pas une pipe)를 인용했다고 밝혔지만(마그리트는 파이프 이미지와 이를 부정하는 텍스트를 통해 단어와 이미지의 배반을 표현했다), 좀더 구체적인 제작 동기는 다음과 같다.

산뜻하지 못한 소수의견이 궁금하다면

몇 년 전, 한 보수매체에서 ‘이승만 바로 보기’라는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전시 포스터는 이승만의 이중적 이미지(독재자/국부)를 흔들리는 초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가만 보노라니 이승만을 전시회라는 매체로 회자하고, 상업적 자본주의식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속셈이 너무 뻔히 보여서 얄미웠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보면 이승만이 어떻게 보이는데?’라는 치기로 그린 그림이다.

라는 작품을 본다. 아무도 없는 밤바다에 달빛에 반사된 노란 창문이 표류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 운명의 위태로운 향방이다. 서글프다. 작가는 대형 사건·사고가 만연한 사회의 소식과, 그 일단락된 두루뭉술한 결론들을 접하며, 작업실에서 ‘국가의 폭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고 한다.

민중미술은 새로운 한국 미술의 가능성을 활짝 열며 출발했다.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결과론적 성과를 추궁하는 질문들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이런, 온정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자고 먼저 제안해놓고선….)

하지만 김정헌을 인터뷰하며 민중미술이 통과한 아픔과 희생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평가 내리는 것은 왠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몇 가닥 가냘픈 전통마저 뿌리내리지 못하고 갤러리의 상품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한국 미술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정말로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금방 또 어지러운 세상에 묻힐 것이다. 이것이 ‘산뜻하지 못한 대한민국 소수의견’의 숙명이다.

그래도, 이 소수의견이 더 궁금한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전시 정보를 덧붙인다. 김정헌 개인전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전’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4월10일까지 전시된다.

조숙현 작가*글쓴이 조숙현은 연세대학교 영상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졸업했다. 한국 커뮤니티 아트 현장의 갈등을 분석하고 ‘한국 커뮤니티 아트의 예술성과 공공성’ 논문을 썼다. 등 문화지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유럽 아트 레지던시에서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2015)를 출간했다. 현재 문화 관련 글을 쓰는 스토리 채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