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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기라는 판타지와 희망”

과거로부터 현재에 연결된 무전 신호를 통해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 드라마 <시그널> 김은희 작가 인터뷰
등록 2016-03-17 21:32 수정 2020-05-03 04:28
<시그널>을 만든 김은희 작가. 한겨레 박미향 기자

<시그널>을 만든 김은희 작가. 한겨레 박미향 기자

(tvN)은 국내 드라마 시장에서 장르물도 대중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강력한 신호였다. 장르물은 마니아들의 선호가 강해 한국의 좁은 드라마 시장에서 자리잡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었다. 많은 장르물이 지상파 채널이 아닌 OCN 등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소화되는 점이 그런 현실을 반영한다.

김은희 작가는 꾸준히 수사물에 천착하며 작품 세계를 넓혀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일하는 법의관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 , 사이버 범죄를 다룬 드라마 ,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한 등은 사건을 둘러싼 음모와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며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드라마다.

은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 강력계 형사와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다룬다. 종영을 코앞에 둔 3월10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김은희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의 작업 세계에 대해 들었다.

“미제 사건, 왜 안 잡히는지 알겠더라”짧으면 하루나 주 단위, 길면 월 단위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보기에 드라마를 쓴다는 일은 긴 레이스인 것 같다. 종영을 남겨둔 시점에는 어떤 감정이 드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되게 소심한 편이다. 1부 끝나면 2부 걱정하고 3부 끝나면 4부 걱정하는 타입이다. 지금이야 추가 신도 수정 신도 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시점이긴 하다. 늘 그렇지만 이번 드라마도 처음 기획하면서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했다. 1, 2부를 쓰기 시작하면서 바로 후회에 들어갔지만.

무전기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데, 하나의 사건을 쓰고 두 개의 시간을 짜야 했다. 미제 사건이 왜 이렇게 안 잡히는지 쓰다보니 알겠더라. 시간이 많이 지나서 증인들의 기억이 사라지고 왜곡되고…. 당시의 증거들이 정말 없었다. 지문이건 DNA건 닳아서 사라져버리고.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혈액은 남아 있기만 하면 DNA가 검출된다고 하더라. 어쨌든 이런 것들을 연결해 말이 되게 하려니 힘들었다.

3부, 4부 나가고 배우들 붙고, 살을 입히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정신없이 달려나가야 하는데 점점 죽고 싶고, 체하고, 나중에는 내가 잘 썼는지 아닌지도 생각이 안 들고. 그래도 이번 드라마는 1부가 나가기 전에 6~8부 정도 찍어놓긴 했다. 추가 신과 수정 신도 낼 수 있어 비교적 여유 있는 편이었다.

많은 시청자가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작가 입장에서도 재미있다, 잘 썼다 싶은 순간이 있을 것 같다. 장르물을 오래 쓰고 봐왔던 입장에서 이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원석 감독님은 장르물을 연출해본 경험이 없다. 나는 쭉 장르물만 했고. 감독님이 첫 회 방송되고 난 다음 초반에 스트레이트하게 나가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감독님은 등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연출해왔던 분이다. 나는 전작들보다 사건에 비해 인물이 더 많이 산 드라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둘이 웃었다.

장르물이란 게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작품을 보면서 흥미로운 사건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고, 인물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시나리오가 호응을 얻은 이유는 균형감을 좀더 맞추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가족의 반응도 좋았다. 남편 장항준 감독이 처음으로 전화해서 물어왔다. 12부 다음에 어떻게 되냐고.

미제 사건에 평소 관심이 많았나.

언젠가 한 번은 쓰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정작 들여다보니 너무 풀기 힘들고 어두운 얘기들이었다. 경찰이 과거에 범인을 못 잡은 사건들을 다루는 거다. 일부러 미제를 만들려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형사들이 있을까. 강력계 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차수현(김혜수)의 대사에도 반영했는데, “현장의 형사들에게 범인을 못 잡는다는 것은 엄청난 괴로움”이라고 했다.

뼈에 새긴 아픔, 희망 나누고 싶어
드라마 <시그널>에서 무전기는 사건을 해결하는 판타지적 요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무전기로 인해 주인공 차수현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작가는 이렇게 희망과 절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란히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tvN 제공

드라마 <시그널>에서 무전기는 사건을 해결하는 판타지적 요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무전기로 인해 주인공 차수현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작가는 이렇게 희망과 절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란히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tvN 제공

무전기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할을 한다.

말했듯 미제 사건 자체가 무거운 얘기다. 이 얘기만 가지고 계속 가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가 아니라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줘야 하는데, 무전기 같은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간다면 조금 더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구에게 주는 희망을 뜻하나.

보시는 분들일 수도 있고, 미제 사건을 겪은 피해자나 피해자 유가족일 수도 있다. 미제 사건이라는 것이 시대적 아픔일 수도 있고, 한 개인의 아픔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접해도 제3자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정신적 아픔이 오는데 피해자들은 어떨까.

해결되지 못한 사건이란 건 뼛속 깊이 남아 있는 고통이다. 지금도 어떤 미제 사건이나 유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 사람, 피해자의 원통함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묻히면 안 된다. 풀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걸 나누고 싶었다.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들이 등장했는데, 캐스팅 뒷얘기가 궁금하다.

모두 1순위로 생각한 배우들을 섭외했다. 김혜수 선배는 영화 스케줄도 있어 안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대본을 보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이 배우가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의외로 흔쾌하게 응답해왔고, (이)제훈이도 그랬다. 제일 힘들게 한 건, (조)진웅이가 속을 많이 썩였다. 대본을 보고는 과거로부터 무전이 오는 게 황당하다고 했다. 끝까지 확답을 안 주다가 우리가 열심히 꼬신 덕분에 마지막으로 캐스팅이 확정됐다.

몇 번이고 취재해야 대사 한 줄 나와취재가 촘촘하다는 평이 많은데, 작업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뤄지나.

일단 아이템이 결정돼야 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현대수사물을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다고 치자. 그러면 뭘 할까 생각하면서 경찰청을 돈다. 어떤 부서들이 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취재 왔다고 하면 안내를 해준다. 특수수사과, 지능수사과, 사이버수사대… 이런 식으로 돌아본다.

의 경우 사이버수사대에 들렀을 때 실생활이랑 가장 연관된 부서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정했다. 이이템이 결정되면 거기에 관련된 자료를 모은다. 책이나 신문 기사 같은 것을 최대한 찾아본다.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얻더라도 일정 수준의 지식 없이 만나면 상대편이 답답해한다. 자료를 보면서 ‘아, 미제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프로파일러구나. 그래서 주인공을 프로파일러로 내세워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엔 강력계 형사를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 중심으로 한 사람씩 만나보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면 그분들이 가지를 쳐준다. ‘미제 사건은 과학감식팀도 중요하니 만나봐라’ ‘젊은 강력계 형사들도 만나봐라’ 이런 식으로. 그렇게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거다.

(드라마에서 ‘경기 남부 연쇄 살인사건’으로 각색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경우, 과거에는 수사할 때 어떤 언어들을 썼는지, 어떤 방식으로 취재했는지 궁금했다. 요즘은 폐회로텔레비전(CCTV)과 스마트폰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추적하며 수사하지만, 당시에는 탐문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담당 형사가 한 얘기는 그때 모내기철이 한창이라 다들 너무 바빠서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화를 냈단다. 그래서 모내기를 같이 하면서 탐문 수사를 했다고 한다. 외제 담배 사서 들고 다니며 어르신들에게 나눠드리면서 하기도 했다.

거기서 쓰는 언어도 중요하다. 때는 아예 사이버공간에 대해 몰라서 다 외계어처럼 들렸다. 그래서 사이버수사대 MT를 쫓아가기도 했다. 개인적 인터뷰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렇게 취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몇 번이라도 가서 물어봐야 대사가 한 줄이라도 나오는 것 같다. 촬영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어서 그때부터는 보조작가들에게 취재를 나눠준다. 인터뷰해서 녹취록을 갖고 오는 방식 등으로. 자료 조사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취재할 때 힘든 점은 없나.

실제 사건이 연상되지만 내용은 완전히 각색한 다른 얘기들이다. 이번에는 지방청 과학감식팀, 광역수사대 인터뷰를 많이 했다. 끝까지 적극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셔서 힘들진 않았다. 사실 경찰서에 상주하면서 취재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너무 빨리 진행돼서, 그 부분이 좀 아쉽긴 하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해야지, 하는 목표가 있다. 늘 그런 마음을 먹긴 하지만. (웃음)

계속해서 수사물을 쓰는 이유가 있나.

잘하는 얘기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의 성공은 그동안 꾸준히 시도해온 장르의 대중적 성공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듯하다.

확인이라기보다는 장르라는 게 만들기도 힘들고 시청률이 담보되는 게 아니라서, 성공을 기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가 다양해졌으면 좋겠고 끊임없이 대중화돼 제작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폭발적 반응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좋겠다.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와줘야 그다음 장르물도 만들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 작가는 한 편 잘되면 세 편까지는 하게 해준다고 한다. (웃음) 다음 것도 할 수는 있겠구나, 이런 생각은 하고 있다.

“이런 사건 있을 수 없다”매번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경찰 인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거대한 사건이 쓰나미처럼 몰아친다.

때도 그랬다. 사건을 짜서 현업에서 일하는 분께 가져가면 이런 사건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최대한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그렇다. 에서도 무전기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사용해 15년 동안 안 풀렸던 사건이 3~4일 만에 풀리곤 하지 않나. 근데 그걸 (현실을 반영해) 1년 동안 드라마로 푸는 걸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극적인 장치와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음 작품도 수사물인가.

그렇지 않을까.

로맨틱 코미디 같은 건.

사랑은 힘들다. 정답이 없어서. 장르물도 정답이 없어 힘들긴 하지만. (웃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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