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걸그룹 유니버스에 어서 오세요

연습생 101명 중 뽑힌 11명 데뷔하는 <프로듀스 101>… 케이팝 걸그룹 게임을 서바이벌 쇼로 확장해
등록 2016-02-23 19:32 수정 2020-05-03 04:28
엠넷 제공

엠넷 제공

픽미 픽미 픽미 업. 이라는 국민 걸그룹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한창이다. 쟁쟁한 기획사들이 추천한 연습생 101명이 실력을 겨루고, 시청자의 투표로 결정된 11명의 멤버가 그룹으로 데뷔한다. 엠넷(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답게 논란도 적지 않다. 또 어떤 악마의 편집이 기다리고 있을까? 대형 기획사의 금수저 데뷔를 위한 병풍 세우기는 아닐까? 아직 답하긴 이르다. 그러나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걸그룹이라는 장르에 입문하기에 제법 좋은 기회다.

미국에 마블과 DC 유니버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걸그룹 유니버스가 있다. 케이팝 걸그룹은 이제 막강한 장르다. 젊고 예쁜 여성들을 모아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는 큰 틀 안에 제작사와 팬들 모두가 공유하는 촘촘한 규칙들을 갖추게 되었다. 기획사는 보컬, 랩, 댄스, 얼굴, 섹시, 애교 등을 담당할 블록들을 모은다. 트레이너를 통해 재능을 키우고, 프로듀서와 안무가의 협업으로 데뷔시킨다. 음원, 공연, 예능, 연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언론 플레이로 상품 가치를 높인다. 팬들은 노래나 춤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멤버들이 연습하고 데뷔하고 예능하고 싸우고 탈퇴하는 과정 전체를 평가하며 소비한다. 음원, 앨범,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고, 팬클럽과 SNS로 마케팅하며 걸그룹의 흥망성쇠에 개입한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게임이다.

은 그 세계를 축소해 서바이벌 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팬들에게 투표권(멤버 선발)의 기회까지 주겠다고 한다. 일본 아이돌 그룹 AKB48의 ‘총선거’ 방식을 따라했다는 의심도 있다. 하지만 AKB48은 모닝구무스메 이후 침체된 아이돌 시장의 궁여지책으로 나온 프로젝트다. 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걸그룹 시장의 한복판에 뛰어들고 있다.

초반의 전개는 제법 흥미롭다. 특히 걸그룹 유니버스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딱이다. SM·YG·JYP라는 3대 기획사의 참여는 저조하지만, 그 밖의 크고 작은 기획사들의 지형도를 살펴볼 수 있다. 기획사 단위의 자존심 싸움에서는 젤리피쉬가 소수 정예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미 방송이나 무대 경험이 있는 출연자들이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상이었다. 3~4회의 그룹 배틀에서는 선배 걸그룹의 데뷔곡들로 공연했는데, 짧은 연습 시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연습생들이 저 정도인데 진짜 멤버들은 얼마나 잘했던 걸까? 원멤버들의 라이브 영상을 일일이 찾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멤버들의 순위가 본격화되면서, 공정성을 둘러싼 시비가 커지고 있다. 국민투표는 핑계일 뿐, 결국 대형 기획사나 연예인 친척들을 위한 짜고 치기가 아닐까? AKB48처럼 무차별의 인기투표로 라이브도 소화할 수 없는 멤버들을 뽑아내는 게 아닐까? 특히 얼굴은 귀엽지만 실력으로는 최하위권인 김소혜의 방송 지분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서바이벌 쇼는 시험장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김소혜의 성장’이 가장 중요한 플롯이고, 그녀를 일대일로 가르쳐주며 현장투표 1위까지 차지한 김세정은 그 드라마의 수혜자다.

뜻밖에도 아직 같은 머리끄덩이 싸움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연습생 생활의 공감 때문일까? 그들은 다른 팀의 공연을 보며 열렬히 응원하고, 이 프로그램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든다.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는 그들이 제일 잘 안다. 최유정이 눈물을 터뜨릴 듯 감격하는 표정은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계단은 잘려나가고, 경쟁이라는 악마가 그들 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낼 것이다. 걸그룹이라는 무대 위엔 당연히 천사가 있다. 그러나 무대 바깥에는 노력하는 미완의 천사와 더불어 악마 몇 방울도 필연인 것이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