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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은 망각하고 있었다

독자 신뢰 잃은 한국소설, 기능 잃은 문학계간지들 ‘무엇이 문학인가’ 더 새롭고 넓게 성찰하고 발굴해야
등록 2016-01-06 20:18 수정 2020-05-03 04:28
2015년 12월3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의 한국소설 코너에서 시민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15년 12월3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의 한국소설 코너에서 시민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15년의 한국문학을 회고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까. 나는 ‘소설의 종말’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소설은 쓰이고 있으며, 읽히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독자들이 당대의 한국소설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감정을 노출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2015년 이른바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의 상황은 그것을 극명하게 증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점가에서 한국소설은 김진명의 소설을 제외하면,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거의 완전히 실종되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동시대의 번역된 외국소설인데, 이것은 한국의 대중 독자들이 동시대의 한국소설에 대한 집단적 불신감을 표현한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른바 신경숙 사태는 한국소설뿐만 아니라, 문인·계간지·문학출판사·문학단체·문단의 존재근거에 대해서도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초래했다. 표절이라는 간명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규명하지 않으며,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 문학 풍토 앞에서 어떤 독자가 한국문학에 대한 신뢰를 지속할 수 있겠는가. 문제 해결 능력이 부재한 문학 풍토에서 문학의 진정성을 역설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소설이 처해 있는 특이성을 물어야 한다면 김진명과 장강명의 소설을 거론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김진명은 한국의 주류 문단과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독자와 대면하여 작품을 써왔고, 한국소설의 침체 속에서도 베스트셀러 현상을 지속해왔다. 주류 문단과 완전히 무관하지만 독자 대중의 지지는 반대급부로 강렬하게 지속되고 있는 김진명의 소설에 대한 비평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문단은 그의 소설을 언급조차 안 하지만.

김진명·장강명, 한국소설이 처한 특이성

반면 신예 작가 장강명의 경우는 유수의 문학상으로 등단한 후, 짧은 시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이 여러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뚜렷한 신진 작가의 부상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도 작품 자체는 물론 독서 시장에서 일정하게 선전했던 작가로 판단된다. 이 현상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등단작인 (2011)으로부터 가장 최근의 (2015)까지 장강명의 소설은 한국의 풍속적 현실의 사회학적 의제를 소설의 테마로 조명하고 있다. 현실과의 거리가 매우 밀접해 동시대적 실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음이 장점이지만, 그만큼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 고전의 반열로 오르기는 어려운 단점이 있다.

2015년의 한국문학을 뒤돌아볼 때 기억하게 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이른바 문학계간지 시스템의 기능 부전이다. 신경숙 사태의 와중에 이나 등의 계간지는 책임 있고 적절한 비평적 대응에 실패했다. 그 실패는 단순히 돌출된 사건에 대한 임기응변상의 실패이기보다는 구조적 모순이 누적된 가운데 나타난 실패라는 점에서 더 뼈아픈 것이다. 백낙청의 은 그가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혁신의 가능성을 보여줄지 알 수 없고, 의 경우 1세대 편집위원들이 사퇴했지만 신경숙 사태의 와중에 보여준 여러 형태의 비평적 실책은 망각되기는 어려운 진행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진우의 비평적 혼돈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오늘의 문학적 상황 속에서 이 문학계간지라는 제도적 존재 형태가 과연 어떤 의미를 띠는가 하는 점이다. 독서 시장에서 소설의 몰락이라는 현상을 생각해보면, 사실 계간지의 지속적인 발행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2015년 겨울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는 점은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문학은 물론 사회적 담론의 중핵 역할을 했던 계간지 시대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15년의 한국문학을 회고해볼 때 이른바 ‘번역 논쟁’이 불거졌던 점 역시 기억할 만한 장면이다. 새움출판사의 대표인 이정서가 김화영을 비롯한 기존 번역자의 오역 문제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번역본을 출간했는데, 이 와중에 벌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오역 논쟁은 뒤이은 신경숙 표절 사태에 의해 봉합되기는 했지만, 한국의 번역 현실에 대한 여러 쟁점들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단순한 스캔들로 치부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문학적 전범 보여준 재일조선인 작가들

번역문학의 또 다른 기억할 만한 풍경으로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의 대하소설 가 완역되었다는 점 또한 상기될 필요가 있다. 제주 4·3항쟁을 총체성의 관점에서 재현하고 고발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과거 실천문학사에서 발췌 번역된 바가 있지만, 이번에야 완역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의 완역을 축하하기 위한 출판기념회에 작가가 참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1회 제주4·3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작가가 수상 소감에서 제기한 발언의 정치성을 문제 삼아 정부가 작가의 재입국을 금지한 것이 그 이유인데, 이는 이 정권 들어 문화계의 여러 국면에서 나타나는 예술에 대한 검열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불길한 행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번역의 문제를 들면서 자연스럽게 재일조선인 문학이 논의된 셈인데, 2015년의 한국문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문학적 전범을 보여준 것이 재일조선인에 의해 쓰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가령 한국작가회의의 ‘올해의 책 선정위원회’는 2015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저작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서경식의 을 선정했다. 이 책에 수록된 문학에 대한 에세이들은 물론 일본어로 쓰였다는 점에서 재일조선인에 의해 쓰인 ‘일본어문학’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을 대상으로 쓰인 에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번역된 한국문학’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이는 김석범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은 한국문학의 범주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적 경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나드는 단계에 이미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이 더 강조되면 문학의 보편성 또는 세계문학과 민족문학(국민문학)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귀착된다.

문학은 이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소설은 문학이지만, 문학은 소설로 한정될 수 없다. 한국소설의 쇠락 앞에서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두 가지 사례가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시무레 미치코의 3부작. 세계문학의 고전인 이 작품의 제2부인 이 2015년 녹색평론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일찍이 번역된 1부 와 함께 통독하고 나서 떠올린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과연 소설인가. 아니다. 이 작품은 문학이긴 하지만 소설로 한정되지 않는 여러 형태의 글쓰기가 혼효되어 있다. 사실과 픽션 역시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사회, 문명에 깃든 심원하고 비통한 통찰력이 빛나는 문학인 것은 분명하다.

둘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수상.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역시 문학이긴 하되, 그것이 소설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기 여성들의 참상,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건의 비극을 저널리스트 특유의 치밀한 감각으로 고통스런 증언자의 육성을 가감 없이 중계하는 작품들이다. 이것은 문학이 재현할 수 있는 인간 조건의 장엄함을 높은 수준에서 밀도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다.

‘소설의 종말’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나는 아직 문학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소설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문학은 이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지 모른다. 그 문학은 단순히 허구/비허구의 경계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환기에 처한 인간·사회·문명에 대해서 다르게, 새롭게, 놀랍게 표현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글쓰기가 어쩌면 문학일 것이다. 평면적 인식과는 다르게, 관습적 표현을 넘어 새롭게, 비통한 고통은 그것대로 응시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싸워나가는 장엄한 인간 활동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일의 놀라움. 바로 이런 형태의 글쓰기가 지금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아마도 이런 문학은 종래의 문단이나 장르 규범에 대한 관례로부터 자유로운 일군의 저자들에 의해 쓰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글쓰기를, 이건 시나 소설이 아니지만 문학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런 작품들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문학적 상황을 ‘소설의 종말’로 과감하게 명명하는 이유는 실제로 소설이 ‘끝’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소설이 잊고 있었던 문학의 더 넓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의도 때문이다.

이런 문학을 발굴하고 조명하고 의미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비평이다. 이런 관점에서 2016년은 문학의 문학성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화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이 한국에서는 히스테릭하게 소비된 측면이 있지만, 그가 생각한 문학 개념 역시 관습화된 장르로서의 문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6년의 화두, 문학의 문학성

반면교사의 성격을 띠긴 하지만, 2015년의 가장 히스테릭한 문학적 사건은 신경숙의 표절 사태와 더불어 박유하의 를 둘러싼 논쟁이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 저작은 연구서라기에는 다분히 서사적이고, 순진한 서사물이라기보다는 그 목적론적 글쓰기의 작위성이 노골화된 글쓰기의 소산이었다. 몇몇 작가와 대중이 이 저작에 대한 빗나간 옹호에 현재도 열중하는 이유 역시 이 작품의 미묘하고도 어두운 ‘의사 문학성’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할머니들의 불행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새로운 문학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이런 문학의 근거를 발굴하고 조명하고 해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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