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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로 가득 찬 도시 서바이벌

텔레토비 동산 재개발 뒤 'SNL 코리아'가 보여주는 최고의 사회 풍자 ‘성호그릴스
등록 2015-11-05 20:17 수정 2020-05-03 04:28
'SNL 코리아' 페이스북 갈무리

'SNL 코리아' 페이스북 갈무리

이번엔 진짜 위험하다. 김병만의 이 아마존에서 툭탁거렸던 피라냐와 악어 정도는 가소롭다. 의 베어 그릴스처럼 코끼리 똥을 짜서 수분을 보충하고, 염소 고환으로 단백질을 섭취하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이 위험천만한 세계에서의 생존법을 알려줄 전문 교관을 소개받았다. 'SNL 코리아'의 ‘Man vs City with 성호그릴스’(사진)다.

출장 전문가 피터 비들컴은 세계 160개국을 돌아다닌 뒤 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해발 7700m의 힌두쿠시산맥을 오르는 일이 러시아워의 일본 도쿄 지하철에서 인파를 밀어내고 회의장에 달려가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브라마푸트라강의 험난한 래프팅도 이슬람 사원에서 무릎 꿇고 예배 보는 행정부 장관을 상대로 계약을 체결하는 일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한다. 야생의 세계보다 문명의 도시가 훨씬 위험하다. 성호그릴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모험지들을 찾아간다. 대한민국의 직장, 편의점, 아파트, 대학 캠퍼스, 입시학원 같은 곳들이다.

밀림에 맹수가 있다면 이곳은 편의점 사장, 대학교수, 직장 상사 같은 무시무시한 포식자들로 가득 차 있다. 먹이사슬의 하위 계층이 출근 시간에 늦었다고 야멸찬 인신공격과 임금 삭감의 위협을 당하는 정도는 약과다. 대학생은 선배에게 게임 아이템을 안 보냈다고 얼차려를 당하고, 아파트 경비원은 택배를 제때 배달 못했다고 무릎 꿇고 사과문을 바쳐야 한다. 편의점 알바는 맹수들이 먹다 남긴 썩은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하고, 대학 조교는 교수의 심부름을 제대로 못했다고 인분을 먹어야 한다.

성호그릴스는 생존의 프로페셔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체절명의 상황을 돌파할 기막힌 방법들을 보여준다. 퇴근 시간에 상사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면, 이동식 책상을 만들어 계속 일하는 척 움직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편의점 사장이 화를 낼 때는 침팬지처럼 손을 맞잡은 뒤 빙글빙글 춤을 추며 관심을 돌린다. 때론 과감한 공격도 필요하다. 갑질과 성희롱을 일삼는 ‘인분 교수’는 당장 포획한 뒤 밀폐용기에 보관된 그의 인분을 재섭취하도록 한다. 하지만 항상 정의로운 건 아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외국인’ 카메라맨을 과감히 희생시키는 결단도 필요하다.

성호그릴스는 근래 'SNL 코리아'가 보여준 최고의 사회 풍자다. 대한민국에서 ‘금이빨을 달고 태어난 일부 맹수의 새끼들’이 아닌 자들이 겪는 삶이 야생의 생존경쟁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보여준다. 동시에 이 프로그램은 'SNL'이라는 미국식 코미디가 한국에서 살아남는 법을 보여준다. 초창기 'SNL 코리아'가 보여준 통렬한 정치 풍자는 텔레토비 동산이 재개발되면서 사라졌다. 그 자리엔 신동엽과 글래머러스한 여자 스타들이 보여주는 섹드립과 성희롱 사이의 야설 코미디만 번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패러디는 살아남았다. ‘극한직업-매니저편’ ‘GTA 게임 시리즈’ 등은 종래의 한국 코미디에서 볼 수 없었던 쫄깃한 재미를 터뜨려주고 있다.

베어그릴스의 야생 다큐멘터리를 패러디한 성호그릴스는 우리의 일상을 외부인의 카메라로 낯설게 보게 한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인생들은 사바나의 초식동물과 다를 바 없이 배고프고 위험하고 자존을 잃어버렸다. 성호그릴스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생존법을 실연해 보이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요즘 말대로 ‘무쓸모’하다. 그래도 우리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웃픔’을 함께 끌어안고 눈물 빠지게 웃게 해준다.

“이건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 성빈그릴스라는 고등학생은 자신의 학교 생활을 멋지게 패러디한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 전국 곳곳에서 또 다른 그릴스들의 활약상이 제보되고 있다. 패러디는 패러디를 낳는다. 그릴스는 그릴스를 낳고 있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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