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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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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블루스가 들려오는 제주 바닷가

제주에서 ‘서브라임’처럼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겠다며 뭉친 밴드 ‘리스펙츠’…
바다에 잠겨 있는 듯, 떠오르는 듯 들려오는 노래들
등록 2015-09-23 17:22 수정 2020-05-03 04:28

청운의 꿈을 안고 제주에서 상경한 밴드 99앵거의 서울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활발히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을 했지만 그만큼의 보상은 따르지 않았다. 팀에서 드럼을 치던 임현종은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서 곡을 쓰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를 때의 이름은 젠얼론(Zen Alone)이었다.

역시 제주에서 헌신적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레이블이 있다. 들국화 출신의 기타리스트 최구희, 제주 출신 싱어송라이터 강아솔 등의 음반을 제작한 핑크문 뮤직이다. 핑크문 뮤직은 자신들이 제작한 음반이 더 많이 알려져 해당 뮤지션이 전국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강아솔이 대표적인 경우이고 젠얼론 역시 제주에만 있기에는 음악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으로 제작을 했다.

젠얼론의 음악은 특별했다. 음반 홍보자료에 쓰여 있는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음반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란 문구 그대로였다. 젠얼론의 음악은 이른바 ‘한국적’이라 불리는 정서와는 표준어와 제주도 방언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데뷔 앨범 (Old Diary)는 이모(emo)를 중심으로 한 어쿠스틱 사운드가 주를 이룬다. 서울에서 공연하며 농담처럼 ‘내한공연’이란 말을 붙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다 건너에서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 바다 건너에서 리스펙츠가 만들어졌다. 럭스를 비롯한 많은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조상현과 함께 매년 제주 바닷가에서 기타 치고, 맥주 마시고, 수영하고, 밤바다 달빛 아래 보트 타고 놀다가 ‘서브라임(sublime)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자!’는 생각으로 팀을 만들었다. 여기에 스트라이커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방영민과 레게 밴드를 했던 베이스 연주자 최민호가 합류했다.

임현종과 조상현은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스카펑크 밴드인 서브라임 ‘빠돌이’를 자처하는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와 위상을 갖고 있는 서브라임의 경우처럼 리스펙츠가 하려는 음악이 대중에게 극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아예 상업적인 기대는 거의 포기한 채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걸 맘껏 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스펙츠가 하고 싶은 것. 그것은 바다에서 들을 수 있고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블루스를 기반으로 펑크와 레게, 스카를 결합한 리스펙츠의 음악은 여유롭고 느긋하다. 제주의 바다에서 노래를 만들고 제주에 있는 핑크문 스튜디오에서 녹음까지 했다. 밴드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온통 바다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들의 음악을 가리켜 ‘오션블루스’란 말이 붙었다.

직접 노래하기 전까지 자신이 노래를 잘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임현종의 보컬은 여전히 감탄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완급 조절을 들려주고, 젠얼론 시절의 격정적인 모습은 옅어졌지만 대신에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의 품은 더 넓어졌다. 멤버들의 오랜 경력을 증명하듯 연주는 아기자기하며 부족함이 없다. 이미지의 구현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만 이들은 사운드의 질감과 악곡, 그리고 정서적 강점을 살려 바다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그곳이 제주도의 함덕이든 캘리포니아의 롱비치 해변이든, 각기 다른 바다의 풍경과 파도와 바람이 앨범 안에 담겼다.

제주와 서울, 바다 그리고 맥주. 이것이 리스펙츠를 대변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든지 이것들이 떠오른다면 성공한 것이라 말했다. 이제 여름밤은 여운 정도만이 남아 있지만 나는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지난여름의 제주 바다를 떠올린다. 함덕과 협재, 하도의 바다였다. 술을 마시지 못해 맥주 대신 콜라를 마시지만 정취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내년 다시 제주를 찾을 때 내 플레이 리스트에는 리스펙츠가 들어 있을 것이다.

김학선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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