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화의 관중 모욕

9월12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우천으로 인한 노게임 선언을 노린 것으로 보이는 한화…
부끄러워해야 할 7년 전 역사를 재현하려 했던 것인가!
등록 2015-09-23 17:19 수정 2020-05-03 04:28

2008년 6월4일은 한국 야구팬들이 최악의 모욕을 느껴야 했던 날이다. 광주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사진). 홈팀인 KIA는 4회까지 만루홈런 등을 앞세워 크게 앞서갔다. 문제는 날씨.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하던 하늘 탓에, 정식 시합으로 인정될 수 있는 5회를 넘기려는 KIA와, 우천으로 인한 노게임 선언을 받기 위해 5회까지 경기가 진행되지 않게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한화의 불꽃같은 개그 배틀이 시작됐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한화의 야수는 평범한 플라이를 놓쳤고, 투수는 투수 앞 땅볼을 처리하려는 의지가 없었으며, 도저히 타자가 칠 수 없는 볼을 계속 던지며 시간을 지연시켰다. 상대의 의중을 간파한 KIA의 타자들은 투수가 던지는 공과 상관없이 허공에 대고 배트를 마구 휘두르며 고의 삼진을 당하면서 서둘러 이닝을 끝냈다. 생중계 중인 시합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이 추태에 중계진은 할 말을 잃었고, 궂은 날씨에도 묵묵히 앉아 응원을 보내던 관중은 경멸을 느꼈다. 경기는 그대로 지속됐고, 결국 5회를 넘겨 7회까지 진행된 경기는 비로 인해 중지되며 정식 시합으로 인정됐다. 이 경기는 프로야구 초창기 한국시리즈 상대를 고르려던 삼성의 ‘져주기 게임’ 이후 한국 야구 역사에 남아 있는 최악의 정식 시합이 되었다.

2015년 9월12일 롯데와 한화의 경기. 전쟁 같은 5위 경쟁을 치르고 있던 두 팀의 충돌에 야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었다. 경기 초반 데뷔 10년 만에 터져나온 김문호의 첫 만루홈런 등으로 롯데가 8:0으로 앞서며 일찌감치 승부가 넘어간 경기. 3회말 롯데의 공격 중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타당한 한화 선발 배영수가 강판되고 올라온 구원투수 이동걸이 1구 만에 롯데 오승택에게 홈런을 허용하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그때 한화 벤치에서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오며 다시 투수 교체를 지시했다. 이미 승부는 넘어갔고, 누가 봐도 불펜 소진을 최소화해야 하는 경기에서, 단 1구를 던진 구원투수를 다시 교체하러 올라오는 한화 벤치의 속셈은 눈에 뻔했다. 최대한 시간을 지연해 경기를 취소시키려는 의도였다. 한화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늘뿐이었다.

한화의 투수 교체가 결정되고 바뀐 투수가 채 올라오기도 전에 경기는 폭우로 인해 잠정 중단됐다. 그리고 한화의 기대와 달리 30분 뒤 그친 비로 인해 경기는 속개됐고, 결국 9회까지 이어진 경기는 롯데의 손쉬운 승리로 끝이 났다. 한화 입장에서는 얄팍했던 속내도 들키고 시합도 진, 실리와 명분을 모두 놓쳐버린 시합이었다.

나는 김성근 감독의 경기 운영에 대한 수많은 논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 그건 김성근 감독의 오래된 스타일이었고, 팀 성적과 선수의 미래에 대한 책임은 후일의 결과를 통해 김 감독 개인이 평가받고 김 감독을 영입한 팀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당장의 승패에 얽매여 리그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거나, 다른 팀 선수단과 야구팬이라는 리그 구성원들에 대한 존중을 상실할 때, 감독 김성근에게 헌사됐던 수많은 찬사는 모조리 철회될 수도 있다.

물론 (늘 그랬듯이) 이유를 댈 수는 있을 것이다. 1구를 던진 투수의 구위가 좋지 않았고, 롯데의 다음 타자가 좌타자 손아섭이었으며, 이왕 넘어간 경기니만큼 어린 투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것 말이다. 백번 양보해 설사 그런 계획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경기 진행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게 리그의 어른이다.

2008년 6월에 있었던 그 추태로 인해 환멸을 느껴야 했던 야구팬들에게, 2015년 9월12일, 폭우 속에 거행된 김성근 감독의 투수 교체 시도는 끔찍한 악몽의 재현이었다. 만약 이 투수 교체에 대해 한화의 코칭스태프가 반성 이전에 변명을 생각하고 있다면, 한국 야구팬들을 정말 바보로 알고 있거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날씨는 하늘에 맡기고 선수는 하늘이 허락할 때까지 야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야구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