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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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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음악은 카메라 밖에

여우 같은 래퍼가 판치는 현란한 경연장 <쇼미더머니> 다른 무대 위에서 더 좋은 음악가들이 더 끝내주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길
등록 2015-07-30 21:37 수정 2020-05-03 04:28
국내 힙합 뮤지션들이 올해 내놓은 음반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JJK의 <고결한 충돌>, 딥플로우의 <양화>, 피타입의 <스트리트 포이트리>, 코드쿤스트의 <크럼플>.

국내 힙합 뮤지션들이 올해 내놓은 음반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JJK의 <고결한 충돌>, 딥플로우의 <양화>, 피타입의 <스트리트 포이트리>, 코드쿤스트의 <크럼플>.

. 15년 전 엠넷에서 만들었던 힙합 전문 프로그램이다. 피타입은 절정신운한아와 함께 무대에서 (The Rezistance)를 불렀다. 주인공은 절정신운한아였지만 피처링을 위해 나온 피타입에게 더 눈길이 갔다. 그는 마치 염불을 외듯 독특한 스타일로 랩을 했고, 이후 그는 한국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됐다.

. 피타입은 다시 엠넷이 벌여놓은 힙합판에 뛰어들었지만 프로그램의 이름도 성격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끝판왕 이미지로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결과는 2차 오디션 탈락이었다. 가사를 까먹는 실수를 두 번이나 했고, 아마 그때가 피타입이란 이름이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15년이란 시간은 정말 많은 걸 변하게 했다. 지금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있는 의 한동철 국장이 15년 전 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가 말 그대로 힙합이 가진 매력과 바이브(분위기)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 에서 그런 낭만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란 이름에 맞게 그 욕망에 더없이 충실하다. ‘사이퍼’(프리스타일 랩 배틀)란 미션 아래 펼쳐졌던 난장판은 그 욕망의 축소판이었다.

“강당에서 수백 명의 랩을 하는 친구들이 탈락, 탈락, 탈락, 이러는 것을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힙합이 이렇게 ×도 멋이 없는 것이었나”라며 에 거부감을 드러냈던 팔로알토가 이제는 심사위원이 돼 그 강당에서 “탈락, 탈락, 탈락”을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 뜨고 싶고 이름을 알리고 싶은 래퍼들이 만 바라보며 진격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힙합은 오직 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화제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힙합평론가 김봉현은 한국 힙합은 보다 크다고 얘기했지만, 지금만 봐서는 가 한국 힙합보다 더 커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피타입이 에 출연했다. “기왕 침 뱉을 거 나와서 뱉자”는 출사표를 던졌지만 뱉을 침을 모으기도 전에 탈락했다. 그는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심정으로 에 출연했을지 모르지만 그곳은 호랑이굴이 아니라 교활한 여우굴이었다. 또 그의 스타일이 란 경연의 장에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정박에 라임을 때려박으며 지루하단 얘길 듣고 있을 때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어린 래퍼들은 그보다 훨씬 더 현란하게 날아다닌다. 어쩌면 그가 그 여우굴을 일찍 나온 게 더 다행인지 모른다. 앞서 말한 ‘사이퍼’ 현장에서 그가 럭비를 했던 취미를 살려 어린 동생들을 밀쳐내고 마이크를 잡으려고 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결국 이건 존중의 문제다. 팔로알토가 말한 강당 심사도, 피타입이 사이퍼 현장에 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피타입의 첫 앨범 (Heavy Bass·2004)는 한국 힙합의 클래식이다. ‘학교/종교/육교’ 같은 끝말맞추기가 라임이란 이름으로 횡행하던 시대에 그가 버벌진트 등과 들고나왔던 한국말 라임의 방법론은 이제 모든 래퍼들의 교과서가 됐다.

올해 나온 네 번째 앨범 (Street Poetry)도 명반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제 피타입은 ‘한국말 라임의 장인’이기보다 에서 가사 까먹고 떨어진 래퍼로 더 많이 기억될 것이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좋은 앨범과 음악가를 계속 기억하고 얘기하는 것뿐이다. 당장 올해만 해도 피타입 , 딥플로우 , 코드쿤스트 (Crumple), JJK , 던말릭 , 제이티 (Delivery Man), 영바이닐스 (Too Young) 같은 좋은 앨범이 많이 나왔다. 최소한 이 앨범들의 가치가 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크다.

김학선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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