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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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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가 않다, 그녀의 자화자찬

방송 복귀 뒤 모성과 여성성 강조하는 예능인의 틀을 거부하며 새로운 길 연 만능 엔터테이너 1세대 홍진경
등록 2015-06-06 20:21 수정 2020-05-03 04:28

“돌아온 90년대 TV 스타”. 얼마 전 MBC 에 새 출연자로 합류한 홍진경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최근에 나 식스맨 후보로 알려졌지만 1993년 슈퍼모델 베스트포즈상을 수상하고 90년대 최고의 스타였거든요.” 낯빛 한 번 바꾸지 않고 스스로를 과대포장하고 자화자찬하며 웃음을 이끌어내는 건 언제나 홍진경의 꾸준한 개그 콘셉트였으나 저 말만큼은 그리 과장이 아니다. 당시 홍진경은 최진실이나 서태지처럼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적은 없을지라도, 일찌감치 독보적인 커리어와 캐릭터를 구축한 신세대 스타였다.

MBC 화면 갈무리

MBC 화면 갈무리

만 열다섯 나이에 모델로 데뷔한 뒤 개그우먼, 진행자, 연기자, 라디오 DJ, 가수 등으로 전방위적 활약을 펼친 만능 엔터테이너 1세대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는 “가장 좋아하는 개그맨”으로 꼽힌 적도 있다. 지금 다방면에서 일명 ‘레전드’라 불리는 스타들, 이영자·전유성·이문세·강호동·안성기 등과 이미 10대 때 나란히 한 무대에 올랐던 이가 홍진경이다. 대기실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참견하는 김구라에게 “모든 연예인들을 앉아서 평가를 해!”라고 날카로운 일침을 놓았던 것도 그녀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홍진경의 자기소개에서 더 눈길을 끈 것은 “여자 예능인의 전설”이라는 표현이었다. 자화자찬 콘셉트의 일부지만 이 또한 과장으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복귀 이후의 행보다. 보통 결혼·출산을 거친 뒤 복귀하는 여성 연예인들은 이른바 ‘아줌마’로서의 정체성 변신을 강요당한다. 결혼보다는 사업으로 인한 활동 중단 의미가 더 컸던 홍진경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SBS 와 , tvN 등의 프로그램에서 아내·엄마·주부의 면모가 강조되기도 했다. 결혼 이후의 험난한 출산기, 사업 성공기, 암 투병기 등의 스토리가 큰 호응을 이끌어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홍진경은 결코 이러한 모습 안에만 갇히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틀에 박힌 삶은 싫다”던 열일곱 신인 시절같이 정제되지 않은 특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결혼·육아와 함께 원숙해진 여성이라는 통념을 거부한다. 최근에 출연한 JTBC 속 모습이 대표적이다. 교내 방송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얘들아 우리 클럽 갈까?”를 외치며 교실을 순식간에 클럽 분위기로 만든 그녀는, “엄마라 아이들을 잘 챙겨줄 것 같다”며 캐스팅했던 연출자의 의도를 통쾌하게 비껴간다.

식스맨 특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부답게’ 요리로 어필해볼 것을 제안하던 유재석의 말에 라면·집밥·부추전으로 계속 메뉴를 바꾸다가 결국 “밀가루 생내”가 가시지 않은 감자전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은 정교하게 계산된 콩트처럼 보였을 정도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반응 때문에 헐렁한 남성 양복과 수염 분장을 선보였던 장면은 더 노골적이다. 그녀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 예능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도한 여성성 아니면 무성성을 택해야 했던 여성 예능인들의 고충을 분장만으로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남장이 아니라 굳이 “자웅동체 콘셉트”임을 강조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고수했다.

여성 예능인으로서 이같은 자의식은 에서도 나타난다. 실시간 반응에 따라 편집이 달라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들은 남성적 시선을 의식한 여성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생존을 모색할 수 있다. AOA의 초아, EXID 하니의 방송은 걸그룹의 숙명인 애교를 빼놓지 못했고, 헬스트레이너 예정화의 방송도 몸매가 더 큰 화제였다. 이 와중에 를 표방한 홍진경은 꿋꿋이 프로필을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 쉴 새 없이 변신하고 망가지는 자신만의 예능 캐릭터로 승부한다. 그래서 전반전 결과는 꼴찌였지만 그녀의 고군분투는 그 자체로 극한 서바이벌 상황에 서 있는 여성 예능인의 현재와 미래를 비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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