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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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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빠져나간 인간

일상의 습관마저 사라져 본능을 향해 퇴보해가는 치매 그린 <스틸 앨리스>
등록 2015-05-29 17:41 수정 2020-05-03 04:28
*에 관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기억이란 무엇일까. 직장에 심란한 일들이 쌓여가면서, 오늘 내일쯤 나 출근길 어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달 뒤 회복 가능할 만큼만 다쳐서 코앞에 닥친 일정들에서 싹 빠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즈음, 과거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았다. 이런 비슷한 기분… 맞아, 전에도 느껴봤지. 너무 심란하고 귀찮아 그냥 못 본 척 문 닫아놓고 벽부터 통째로 시멘트 발라버리고 싶던…. 그런데도 피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했던. 다시 잘 더듬어보니, 그때처럼 온전히 혼자도 아니고 그때처럼 근본적이거나 온 존재를 걸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 적어도 과거 겪었던 일들보다는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일임을 깨닫게 됐다. 기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당시엔 죽을 듯 힘들었던 일도 이젠 까맣게 잊고 직장의 일상다반사 정도에 허덕이며 계단 낙하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기억이란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각자 기억의 총합이며 남들이 각자에 대해 간직한 기억의 총합이다. 우리의 삶은 그저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 까맣게 잊은 듯했던 과거의 괴로움도 어떤 작은 계기로 다시 떠오르듯이, 기억은 퇴색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닐지언정 가볍지 않다. 내 기억이 없어진 나를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보낸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하굣길에 상가 주변을 몰려다니던 단발머리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마감 뒤 동료들과 부딪치던 치킨집 맥주잔의 기억, 그리고 아이가 엄마 주려고 주워왔다는 꽃 이파리의 기억이 날아가고 없는 것을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을 DNA만으로, 한 줌의 기름과 광물만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그 어떤 에센스가 바로 기억이다. 문화와 기억의 주입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능 덩어리 짐승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서 기억이 사라져가는 과정은 동물로 변화해가는 과정, 본능만을 향해 퇴보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드라마 에서도 그랬다. 주인공은, 눈이 멀도록 반한 남자가 데이트 자리에서 미처 점심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저녁 같이 먹자고 청하게 만들 정도로 매력이 넘치던 여자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아무 데나 오줌을 뿌리고 미안함도 창피함도 모른 채 본능만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은 접어두고라도 일상의 기억과 습관마저 사라져버린 인간이란 스스로에게도 주위에도 얼마나 비극인지를 보게 됐다. 사람에게서 기억이, 즉 에센스가 빠져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 보여준다. 나는 영화를 보며 매우 무서웠지만, 치매 걸린 어르신을 모셔본 내 친구들은 저건 너무나 미화된 특이한 케이스라고 했다. 퇴행이 거의 모두 지적 능력에만 맞춰졌다고, 그리고 저런 재력과 가족을 갖춘 환자도 흔치 않다고. 영화를 보며 제발 저 자살이 성공하길 바랐다고 말하자 내 친구들은, 치매란 그런 정신 능력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중년의 친구들끼리 처음으로 야구장에서 피자도 먹어보고 노땅용이지만 클럽도 가보고, 뭔가 쑥스러운 일을 시도할 때마다 변명처럼 “이다음에 요양원에서 이런 추억 하나 없으면 어쩌니” 하고 말해왔는데, 노년에 더듬어볼 기억을 갖겠다는 것조차 사치일 수 있겠다.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남아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현실이니. 그래서 그저 결론은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아라’인 건가. 오늘이 머나먼 기억이 되었다가 결국 날아가 사라져버린대도 어쩔 수 없기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재 이 순간뿐이기에. 그래도 오늘이 있었기에 좋았던, 좋은, 그런 삶이기에.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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