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1990년대 고종석 기자의 팬이었다. 20대 초반 읽은 그의 문학저널은 신세계로 보였다. 그가 문학비평가 시리즈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감탄하며 읽었던지 난생처음 가위로 잘라 스크랩을 해놓았다. 고 김현, 김윤식, 백낙청, 최원식 등으로 이어지는 글을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다.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 그렇게 읽혔다.
첫 소설 을 읽고 유럽을 동경했다. 첫 산문집 을 읽었을 땐 당장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당시 여권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유럽으로 떠나 고종석이 거닐었던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에 수록된 모든 책을 읽고 싶었고, 에 인쇄된 모든 단어를 필사하고 싶었다. 를 떠나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도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극우주의를 유려한 글로 비판하는 대목을 만날 때면 ‘내가 롤모델을 제대로 삼았구나’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러나 나는 고종석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었으며, 따라가려 해도 그는 언제나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 내달리고 있었다. 3년간 대학신문을 만들다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버린 학점을 때우느라 군 제대 뒤 4학년에 복학해서 겨울방학까지 계절학기를 들어야 했다. 문학 저널리스트가 되려 했던 내 청춘의 꿈은 20대 후반에 조용히 사라져갔다. 마음 한구석에 내 스스로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애써 잊으려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 그 낙인은 희미한 형체만이 남아 있다.
고종석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 것은 지난해 노아 바움백 감독의 를 본 뒤였다. 27살의 뉴요커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의 꿈은 유명 댄서가 되는 것이다. 실력은 형편없었다. 누가 봐도 ‘댄서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프란시스는 현실에서 멀어져가는 꿈을 마음에 담아둔 채 안무가의 길로 들어섰다. 프란시스의 원래 이름은 ‘프란시스 할러데이’다. 그는 쿨하게 자신의 성을 ‘하’로 바꾸고 새 인생을 찾아나섰다. 능력이 자신의 꿈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그 길 위에 서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프란시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는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는 대신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꿈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극장 문을 나서며 ‘나는 왜 프란시스처럼 쿨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신작 의 주인공 조쉬(벤 스틸러)도 프란시스처럼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인다. 뉴욕의 44살 다큐멘터리 감독 조쉬는 원칙주의자다. 6시간이 넘는 다큐를 10년째 찍고 있다. 어느 날 자유분방한 다큐 감독 지망생 제이미(애덤 드라이버)를 만나 생의 활력을 얻지만, 다큐의 윤리성을 무시하고 찍는 제이미의 작업 방식에 환멸을 느끼며 갈등을 겪는다. 조쉬는 고지식한 원칙에 자신을 동여맨 채 디지털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과 대중이 보고 싶은 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다큐를 잘 찍어도, 보려는 관객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결국 ‘악마’처럼 보였던 제이미를 이해하고, 중년의 나이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프란시스와 조쉬는 세상엔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스테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문학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한 차례 좌절 이후 눈앞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으려 했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공연과 음악 관련 분야도 취재하며 살았다. 나도 프란시스처럼 바뀌었고, 조쉬처럼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 고종석이 몸담았던 의 자매지 에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인생이 펼쳐졌다.
곽명동 객원기자·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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