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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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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아저씨, 바이바이!

등록 2001-11-15 00:00 수정 2020-05-03 04:22

스크린 밖으로 밀려난 ‘어깨’들의 혈투…찬바람과 함께 색다른 멜로영화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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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영화들의 흥행 돌풍이 마무리에 들어갔다. 이제 막 극장가에 나선 <달마야 놀자>가 변수이긴 하나,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으로 이어진 조폭 유행의 체감도는 쌀쌀해지는 날씨와 함께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흑수선> <화산고> 등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보일 예정이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을 유난히 기다리는 건 멜로다. 순정영화를 표방한 <와니와 준하>와 한·일합작 &ltGO&gt가 오는 11월23, 24일 나란히 개봉하는 데 이어, <버스, 정류장> <결혼은, 미친 짓이다> <후아유> <질투는 나의 힘> 등이 내년 봄까지 갖가지 사랑을 이어갈 예정이다. <하루> <선물> <시월애> 등 바로 전 시즌의 멜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을 극도로 비극화하면서 관객의 감정을 뽑아먹으려는 장르의 구태의연함에 갇혀 있었지만, <와니와 준하>로 시작하는 이번 시즌의 멜로들은 예년과 많이 달라보인다. 청춘의 새로운 고민들, 제도에 갇힌 욕망과 탈주, 실존적 쓸쓸함 등 사람들의 현실에 바짝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멜로는 진부한 장르 취급을 받기 쉽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이들을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내밀히 지켜본다는 점에서 문제작을 만들 여지가 풍부하다. <박하사탕>의 ‘사회파 감독’ 이창동이 “사랑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그 자체로 선악을 따지기 힘든 감정인데도 사회적 제약이나 관습, 도덕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아서 한발만 물러서면 불륜이고, 죄악이 되기도 한다”며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추악한 남녀의 사랑’ <오아시스>의 촬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이쯤에서 이번 시즌의 멜로가 흥행 전선의 기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와니와 준하>…지나간 사랑과 현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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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집단에서 출발한 청년필름의 창립작품 <와니와 준하>(감독·각본 김용균)는 순정영화를 표방했고 예쁜 포장에 충실하지만, 영상으로 순정만화 특유의 섬세한 심리 표현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26살의 애니메이터 와니(김희선)는 여린 듯하지만 용감하다. 이복동생 영민(조승우)과 닿을 듯 말 듯한 첫사랑의 그늘에 머물러 있으나, 돈벌이보다 소신에 관심있는 시나리오 작가 준하(주진모)와 동거중이다. 와니가 대학 진학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하고 싶은 걸 하겠다며 고생스런 애니메이터의 길을 자청한 모습이나 준하와 스스럼없이 동거하고 게이 동료를 유난히 챙겨준다는 점에서 요즘 청춘의 자유로움을 그려내고, 지나간 사랑에 붙잡혀 있지만 현재의 사랑에 사려깊고 솔직한 배려를 베풀 줄 안다는 점에서 이십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함을 드러낸다. 와니의 감정선과 기억을 조근조근 따라가다보면, “사람 마음은 복잡해서 진심을 알기 어렵다”는 준하의 시나리오 주제를 실감하게 되고, 이 때문에 관계가 복잡해지는 평범한 현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현실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던 <봄날은 간다>의 대사와 겹치면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골치아픈 사랑을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랑학 개론이 되기도 한다.

스타맥스와 일본의 메이저영화사 도에이가 공동제작한 &ltGO&gt는 명계남, 김민이 잠깐 등장한다는 것과 원작소설의 저자나 주인공의 신분이 재일동포 3세라는 점을 빼놓으면 일본영화에 가깝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순지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지낸 유키사다 이사오가 연출하고, 구보즈카 요스케·시바사키 고우 등 일본의 아이돌 스타가 주역을 맡아, 일본적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작품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산가족이자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일본 안에서 겪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남한과 북한 체제 사이에 끼인 존재의 갈등으로 넓히고, 이를 <비트> 같은 청춘영화가 익히 보여온, 기성 세대에 반발하는 젊은이 특유의 감성과 연결시켜가는 맥락이 뛰어나다. 또 “이 이야기는 나의 연애이야기다”라고 되풀이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말처럼 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 상업적 코드도 놓치지 않고 있다.

<후아유>…네트워크 세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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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GO&gt와 더불어 ‘청춘멜로’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 <후아유>(감독 최호)다. TTL 광고를 만든 광고사 화이트와 <접속>의 제작사 명필름이 함께 설립한 디엔딩닷컴의 창립 작품으로, <접속>의 속편격답게 “세 가지 아이디, 다섯개의 이메일 어드레스, 100개의 전화번호, 두 시간 반 동안의 수다…” 등으로 수식되는 ‘네트워크 세대’의 일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네트워크 세대의 속내를 얼마나 잘 살려낼지가 문제일 텐데, 이는 <춘향뎐>의 조승우가 맡은 게임기획자 ‘형태’의 캐릭터에 잘 요약돼 있다. 형태는 지금은 쫄쫄 굶어가며 고되게 일하는 벤처기업 종사자답게 언젠가 터질 대박을 손꼽는다. 영화는 이 기다림의 시간에 담긴 요즘 젊은이의 야심과 욕망, 절망감 등을 제법 밀도있게 담고 있는 중이다. 또 한 가지는 이들의 사랑법이다. 이나영이 맡은 수족관 다이버 인주는 형태와 마찬가지로 가상공간에서는 정열에 넘치고 솔직담백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무척 덤덤할 뿐 아니라 이성에게서 또 하나의 생채기를 얻을까 노심초사한다. 이런 미묘한 감정선은 <접속>에서 이미 성공한 바 있다.

제도가 밀어내고, 제도에서 탈주하려는 이들의 사랑을 담은 영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버스, 정류장>이다. 시인 유하가 감독을 맡아 촬영중인 <결혼은…>은 결혼을 극히 혐오하고 회피하는 대학강사(감우성)와 결혼을 필요조건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자유로운 연애를 좇는 ‘자유부인’(엄정화) 사이의 사랑담이다. 말하자면 ‘불륜’ 영화인 셈이지만, 두 인물의 고민과 갈등이 제도로서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 방점을 찍을 만하다. “진정한 멜로드라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예에서 보여지듯, 제도와 관습의 틀을 위반하고 그것의 불온한 경계선상에서 벌이는 남녀간의 전복적 형태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작품의 전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버스, 정류장>의 사랑은 서늘하고 따뜻하다. 여고생(김민정)과 학원강사(김태우)는 10대와 386세대가 각각 가질 법한 상처와 좌절을 안고 사회 시스템에서 가파르게 밀려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그걸 쓰다듬어주다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다. 원조교제성 사랑담으로 화제를 끌려는 작전이 아니냐고 본다면 한참 오해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의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여성감독 이미연의 데뷔작으로, 이 감독은 기존 멜로의 관습, 예컨대 기름기 낀 판타지 구조를 완전히 깨겠다는 의욕으로 이제 막 촬영을 끝냈다.

또다른 여성감독 박찬옥이 연출·각본을 맡은 <질투는 나의 힘>은 ‘불안한 청춘, 난처한 로맨스’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옛 애인을 뺏어간 연적에게 새 사랑을 또다시 뺏길 위기에 처한 대학원생(박해일), 삶의 낙을 로맨스에 두고 사는 문학잡지 편집장(문성근),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구애를 동시에 받는 수의사 겸 사진작가(배종옥) 사이의 삼각관계 이야기다. 대사를 잠깐 엿들어보면 이들이 어떤 결핍을 가진 문제적 인간들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질투는…>…문제적 인간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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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냥 섹스를 하게 됐냐면…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서부터야.”(배종옥)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꼭 자야 된다면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박해일)

이 영화에서 삶의 아이러니와 청년기의 정서를 색다르게 그려낼 박찬옥 감독은 <해피엔드>의 정지우,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에 이어 ‘영화제작소 청년’ 출신으로 데뷔전을 치르는 세 번째 감독이다. 영화라는 건 완성된 뒤에야 생김생김을 제대로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열혈 영화청년들이 멜로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게 이번 시즌 멜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미 납품을 끝낸 <와니와 준하>와 &ltGO&gt 이외의 작품들이 애초 의도를 얼마나 잘 화면에 담아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다가오는 겨울을 재밌고 따뜻하게 보내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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