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가끔 쓰세요?”
“그 얘기는 (근래 들어) 처음 듣네요. 안 쓴 지 정말 오래됐어요.”
그는 더 이상 ‘시인’ 유하가 아니었다. “영화 한 편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진” 시대를 살고 있는 영화감독 유하였다. “시는 떠오르지 않지만, 더디게 써지는 시나리오는 계속해서 쓰는”, 영화감독의 정서가 우세한 유하는 괜히 낯설었다. 시인 유하로 만난 적도 없으면서.
유하 감독이 2004년 로 시작한 ‘거리 3부작’에 마침표를 찍는 (1월21일 개봉)을 들고 왔다. 그 사이에는 조인성이 삼류 건달의 비루한 삶을 보여주는 (2006)가 있었다. “가 학교에서 어떻게 폭력을 만들어내는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는 돈이 어떻게 폭력을 소비하는가를 말했다. 그리고 은 권력이 폭력을 소비하는 이야기다. 세 작품은 모두 거리에서 배회하는 뒤틀린 청춘의 이야기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뒤틀린 청춘의 이야기”
‘거리 3부작’은 배우만 놓고 보면 당대의 청춘물이다. 2004년의 권상우는 의 ‘터프가이’ 하이틴 스타였다. 2006년의 조인성도 시트콤 에서 얼굴을 알린 뒤 을 통해 연기의 맛을 알아가던, 연기에 물이 오른 상태는 아닌 ‘하이틴 스타’에 가까웠다. 의 주연 이민호도 마찬가지다. 를 통해 스타덤에 올라앉은 그는, 귀공자·재벌 2세 역할만 해온 귀한 이미지에 소녀팬을 몰고 다니는 스타다. “배우 캐스팅의 기준이 뭐예요?” “상업영화에서 팬덤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거야 당연하죠. 다만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친구에게서 반대 이미지를 구축했을 때 전복적인 쾌감이 있어요. 당시 정말 어렵게 캐스팅한 권상우씨는 터프가이였는데 모범생으로 바꿨죠. 조인성씨도 ‘비열한 삼류 건달’ 이미지는 당시에 전혀 없었다. 이민호씨도 귀공자·재벌 2세 이미지인데 고아 출신 넝마주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죠.”
은 김종대(이민호)·백용기(김래원)라는 가진 것 없는 두 청춘이 땅과 돈과 식구를 가져보겠다는 욕망을 안고 내달리는 이야기다. 종대와 용기는 서울 강남 땅 대부분이 배밭이던 1970년대, 주민등록도 없는 고아로 넝마를 주우며 무허가촌 판잣집에 살다가 그마저 철거돼 내몰린 ‘철거민’이다. 하다못해 술 먹고 때리는 부모마저 없는, 밑천이라곤 몸뚱아리 하나뿐인 인물들이다.
시인은 시를 잊었다지만, 그의 시는 영화 곳곳에서 떠오른다. 의 종대와 의 주인공 현수(권상우)의 눈빛은 비슷하다. 그들의 눈빛에서 유하의 시 ‘코코코’에 나오는 ‘무구한 아이’가 떠올랐다. ‘코코코’ 한 뒤 ‘입!’, ‘코코코’ 한 뒤 ‘눈!’을 짚는 놀이에서 “입도 눈도 아닌, 귀를 짚어 까르르 웃음거리가 된 한 꼬마아이”. “입도 눈도 아닌 것은 영원히 건널목을 건널 수 없나요? 코코코 게임을 즐기는 힘센 어른들에게 그 아이의 무구한 눈동자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어”라고 시인은 쓴다. 건달이 된 뒤에도 종대의 눈빛이 그랬다.
‘거리 3부작’은 ‘강남 3부작’이기도 하다. 세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모두 ‘강남’이다. 에서 현수는 “땅값이 오를 거라는 엄마의 선견지명”으로 ‘말죽거리’로 이사왔다. 에서 건달 병두(조인성)가 배회하는 곳은 룸살롱이 즐비한 강남의 어느 거리다. 유하 감독에 따르면 “깡패들도 상권이 있는 곳에서 활약한다. 상권이 발달한 곳에는 지하철역마다 조폭파가 다르다. 의 배경이 강남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곳이 대한민국 최고의 상권이기 때문이다”. 은 두 영화의 프리퀄적 성격을 띤다. 현수 엄마의 ‘장차 땅값이 엄청나게 오를 거라는 선견지명’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왜 강남에 돈이 몰리고 조폭들도 몰리는가에 대한 ‘팩션’이기도 하다.
왜 10년 동안 강남을 이야기하는 걸까그 이유로 영화는 권력을 정조준한다. 강남이 지금의 강남이 된 건 권력의 땅투기 때문이라고. 애초 영화는 1970~77년 서울시에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등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쓴 의 ‘남서울 개발계획’에서 출발한다. 손정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서울시 실무과장에게 과천·서초·강남·잠실 가운데 투자가치가 큰 지역을 꼽도록 지시했고, 서울시 실무과장이 땅을 사고 땅값이 오르면 되팔았다. 땅을 사모은 뒤 남서울 개발계획이 발표됐다. 권력의 땅투기는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실행됐다. ‘부동산 불패 신화’ 강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유하가 과거를 다루는 방식은 영화 이 과거를 말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영화에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대를 그리워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 시대를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지금 강남이 천민자본주의의 온상이 된 것은 나라에서 땅투기를 하고 거기에 시민들이 동참해 땅을 사고 굴리면서다. 결국 은 돈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하는 시절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다. 돈의 가치가 어떤 가치보다 우월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다른가. 달라진 게 없다. 그때보다 더 심화된 부분이 있다.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권력의 전횡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모습은 결국 그 시절이 남긴 그림자 아니겠나. 은 그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추억하며 영웅화한다면, 은 “지갑이 형님, 돈이 최고인 세상의 상징으로서의 강남을 통해” 오늘을 반성한다.
왜 유하는 10년 동안 강남을 이야기하는 걸까. “성장기의 핵체험이에요. 모든 창작자에게는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한 시기에 맞닥뜨리는 핵체험이 있기 마련인데, 저에게는 1974년 답십리에서 강남으로 이사와서 맞닥뜨린 강남의 풍경이 그에 해당합니다. 처음 이사갔을 때 친구들의 절반은 소작인의 자제였어요. 남의 땅에 농사를 짓고 가게를 내서 장사를 하고 한남동까지 가서 배추를 팔았죠. 나중에 개발 붐이 일면서 토박이들은 땅이 수용되거나 비워줘야 해서 성남 등 더 남쪽으로 많이 밀려났어요. 그때의 경험과 이미지, 친구들이 문학으로든 영화로든 계속 등장하는 것 같아요.” 의 현수에게는 감독의 자아가 투영돼 있고, 종대는 현수의 친구다. “중학교 때 제 짝이었던 친구가 등록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고, 그 주변에서 넝마주이를 했어요. 학교를 오갈 때 그 친구를 만나면 눈인사를 했어요. 눈인사만 했을 뿐,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어요. 건널 수 없는 계급의 강이라는 게 있는 건지. 그때의 잔영들, 어린 나이에 죄의식 같은 것도 느꼈고요. 그 넝마주이 친구의 이야기가 이죠.”
`거리 3부작은 폭력 3부작’이기도 하다. “제 영화에는 마초이즘에 대한 매혹과 경멸이 한 몸으로 있어요.” 폭력과 마초이즘이 찐하다. 특히 의 진흙탕 액션신은 ‘리얼리스트’ 유하답지 않게 스타일에 힘을 준 장면이다. “그 장면은 사실 권력에 소비되는 ‘하수인’들의 대리전이에요. 논두렁 건달의 원초적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 처절하되 불쌍한 페이소스가 있었으면 했어요.” 그가 ‘3부작’에서 폭력을 끝까지 밀고 간 이유는 “현실에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수컷 되기를 강요하는 학교에서 괴물이 돼 옥상으로 올라갔고, 종대 역시 괴물이 돼 진흙탕 뻘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종대와 용기가 괴물이 된 건 1970년대가 주입한 돈과 땅이라는 ‘가짜 욕망’ 때문이다. 무허가로 살면서도 즐거운 한때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시대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에서 유하는 처음으로 다중플롯 방식을 선택했다. “종대와 용기뿐 아니라 부동산 큰손이자 여당 소속의 전 국회의원인 서태곤까지 주인공이다.” 그 복잡한 인물들 각자의 서사와 시대의 서사를 버무리다보니 영화는 버거운 느낌이 든다. 인물 각자의 이야기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이미 에서 많이 뽑아낸 기억이어서일까. 다른 이야기지만 이미 본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에서 유하 창작력의 원천으로 꼽은 시인과 영화감독의 대결, 스토리와 스타일의 줄다리기, 장르의 익숙한 패턴과 일상의 생경한 리얼리티, 생생한 욕망과 그 뒤로 이어지는 덧없는 포말 등 ‘긴장의 대결’은 에서는 사실 발휘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은 것은 거대한 기획 시대극 한 편일 뿐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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