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는 달력과 함께 저문다. 달력이 한 장 남으면 그해도 막바지다. 새해 역시 달력과 함께 온다. 새해 달력에서 공휴일과 휴일을 챙겨보기도 하고 지인의 생일과 기념일을 기록하기도 한다. 1년 365일은 누구에게나 같으되, 각자의 하루는 모두에게 다르다.
<font color="#C21A8D"><font size="3">364명의 하루, 365일의 달력</font></font>“모든 사람의 하루는 공평해요. 나의 하루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하루도 소중합니다.” 이 생각이 깃든 2015년 달력이 있다. 달력의 이름은 ‘하루를 쓰다’. 364명이 하루를 썼다. 스무 차례 넘게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결국에는 노숙인이 된 손성일(60)씨는 2014년 1월21일에 2015년 1월1일을 썼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교 밑에서 술에 취해 잠든 손씨를 붙들고 울며 라면과 침낭을 가져다준 노숙인들의 밥집 ‘바하밥집’ 주인장의 도움이 있었다. 손씨는 새해의 1일을 쓴 뒤 노숙생활과 이별했다. 노숙인들을 위해 손수 밥을 짓고 챙기면서 자활하고 있다. ‘어린이의 달’ 5월 중 18일은 6살 쌍둥이 자매 영은이와 영화(아래 사진)가 썼다. 영은이는 1을 쓰고 영화는 8을 썼다. 쌍둥이가 함께 하루를 완성했다. 래퍼이자 배우인 양동근은 부모님을 모시는 작은형에게 주는 선물로 형의 생일인 4월17일을 썼다. 모두 자신이 쓴 ‘하루’ 아래 이름을 남겼다. 1월과 12월은 노숙인, 2월은 이주노동자, 3월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친구, 4월은 문화예술인, 5월은 아이, 6월은 탈북인, 7월은 평화를 꿈꾸는 사람, 8월은 장애인, 9월은 농부, 10월은 세월호 광장의 시민, 11월은 암환우들이 쓰고 이름을 남겼다.
달력은 아트랩꿈공작소 작가 최성문씨가 혼자 꾼 꿈을 여럿이 함께 꾸며 완성됐다. 노숙인 자활을 돕고 싶던 그에게 노숙인의 하루도, 장애인의 하루도, 문화예술인의 하루도 다 같고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은 달력 프로젝트가 떠올랐고 날짜를 쓴 364명을 포함해 달력디자인·투명한 재정관리·사진작업 등을 함께 한 400명의 손길이 모여 달력이 완성됐다. 10월31일은 달력을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하루로 채울 수 있게 비워뒀다. 달력 판매 수익금은 모두 노숙인 자활기금으로 전달된다.
사람들의 뇌리에 ‘끝났다’고 새겨진 사건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끝나려야 끝날 수 없다. 그 속에 여전히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 강정마을이 그렇다. 지금은 발파된 구럼비 바위가 있던 자리에서 해군기지가 매일 자라고 있다.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는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4시 ‘해군기지 건설 중단 기원’ 미사를 봉헌한다. 경찰은 의자째 미사 중인 신부들을 들어내기도 하고 대형 레미콘이 “못 봤다”며 사제를 밀고 나오기도 한다. 신문이 보도하지 않는 ‘현장’에 대한 사진가들의 뜨거운 마음이 2015년에도 달력을 만들었다. 달력의 이름은 ‘빛에 빚지다’. 사진이 얻어지는 것은 뜨거운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줌 빛이 있어야 찬란한 풍경도, 가슴 저린 삶도 담을 수 있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최대한의 연대를 위한 ‘최소한’ 달력 </font></font>
이 달력을 만든 이는 최소한의 변화를 위해 최대한의 연대를 꿈꾸는 사진가들이다. 2009년 서울 용산에서 벌어진 참사를 두고 볼 수만 없어 유가족들에게 작은 연대라도 하고자 시작된 ‘최소한’ 달력이 기륭전자 해고노동자(2010), 쌍용차 해고노동자(2011), 콜트·콜텍 해고노동자(2012),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2013) 등 여전히 끝나지 않은 ‘해고’의 현장을 지나 올해는 ‘마을’로 향했다. 역시 올해 행정대집행이 있은 뒤 ‘끝났다’고 여겨지지만 그곳에 사는 할매·할배들에겐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의 현장, 경북 청도 송전탑 건설 반대의 현장,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에 달력 판매 수익금을 전달한다. 강재훈·노순택·박승화·점좀빼·정택용·한금선·홍진훤 등 36명의 사진가들이 참여했다. 1천여 명의 시민과 30여 개의 단체가 선구매 방식으로 이름을 후원했다. 올해는 연대마을이 3곳이어서 특별히 스케줄러도 만들었다. ‘최소한’ 달력을 총괄 기획한 신유아씨는 “이 달력을 통해 잊혀져가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싸움의 현장을 1년 내내 기억하고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환경 공익 디자인그룹 ‘슬로워크’는 2014년에서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하루 4월16일에 집중한 ‘4·16 달력’을 만들었다. 슬로워크는 2014년 4월17일 제주도 워크숍이 계획돼 있었고, 오래전 계획한 워크숍이라 사고가 일어났지만 계획대로 제주에 갔다. 조성도 슬로워크 이사는 “직원들 모두가 제주에 있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죄책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슬로워크의 ‘4·16 달력’은 사람들이 말하는 ‘세월호 피로감’에 대한 작은 저항이다. “가슴 아픈 기억이고 사건이고 사고이지만, 늘 곁에 두고 보면서 기억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늘 기억해야 할 그날, 4·16 </font></font>
4·16 달력은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한 디자인그룹이 세상에 내는 목소리다. 4·16을 양각으로 새긴 달력 표지는 손으로 만지며 세월호를 가슴에 새기자는 뜻을 담았다. 사진과 그림이 있을 자리에는 4·16이라는 아픈 숫자만 쓰여 있다. 휴일과 기념일은 표시하지 않았고, 4월16일 역시 비어 있다. 조성도 이사는 “불편하고 불친절한 달력이고, 이 달력을 보면서 매일이 가슴 아플 수도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될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2015년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달력 판매 수익금은 모두 ‘4·16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에 전달한다. 4·16 달력은 소셜펀딩 사이트인 텀블벅(www.tumblbug.com)을 통해 12월30일까지 제작비 후원 및 선주문을 받고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사진/최성문 제공, ‘최소한’ 제공, 슬로워크 제공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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