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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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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여기에 살아 있다오

영원한 사랑이 사라진 시대 76년을 함께한 촌부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담은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록 2014-12-24 16:13 수정 2020-05-03 04:27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가 함께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 사진 영화사 ‘하늘’ 제공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가 함께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 사진 영화사 ‘하늘’ 제공

이상하다.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남아 있었다니.

무려 76년간 알콩달콩 살다가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이라니. 이것은 거의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고생물체를 보는 듯한 감격이다. 아니다. 전설로만 들어온 상상의 동물을 보는 듯한 충격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진귀한 사례에 대한 생태보고서이거나 사랑의 가장 원형질적인 모습을 발굴·전시한 인류학적 기록물이다. 강원도 횡성장에 고운 한복을 커플룩으로 입은 노부부가 손잡고 다닌다는 제보는 지역 신문과 공중파 TV에 소개되었고, 진모영 감독은 1년3개월간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랑과 애틋한 이별을 담은 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리액션

노부부가 낙엽을 쓸다가 던지며 장난치는 모습은 흡사 의 눈 장난을 연상시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 의 가사처럼 할머니 손등을 간질인다. 두 사람이 전하는 사랑의 공식은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리액션’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만지고, 입김을 불어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장난에 강력한 뒤끝으로 응수한다.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는 게 아니라, 티격태격 놀아준다. 이토록 다정한 노부부라니, 이들이 과연 촌부인 게 맞나 싶다.

조실부모한 조성만 할아버지는 23살에 14살 강계열 할머니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6년간 일해주고 성례를 올렸다. (1935)의 ‘점순이와 나’가 이들의 과거형이었던 셈이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이 생겨 “외로움을 모르고 살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아내에게 성관계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아내가 먼저 안겨올 때까지 기다리며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손길이 지금도 남아 서로를 쓰다듬는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의 질곡을 헤쳐온 촌부가 평생 아내를 존중하며 살기란 드문 일이다. 예컨대 할아버지는 겨우 살 만해졌을 때 의 남편처럼 변심하지도 않았고, 해방과 한국전쟁과 근대화의 질곡 속에서 헛꿈에 사로잡혀 집을 떠나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바람기로 해소하지도 않았다. 그는 동시대 한국 남성과 달리 아내를 무척 아꼈다. 험한 농사일을 시키지도 않고, 반찬 타박을 한 적도 없으며, 권위를 내세우긴커녕 늘 장난을 쳐댔다. 두 사람은 서로 ‘하오체’를 쓰며,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칭찬과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이 영화에 세대를 초월한 관객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고, 특히 20대 관객이 절반을 이룬다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동안 로맨스는 근대적 정서로 취급됐다. 그것은 현실과의 접점에서 급격히 소멸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사랑’은 환상으로 치부됐다. 영원한 사랑을 그리려는 자는 사랑이 식기 전에 서둘러 죽음이나 금기를 불러와야 했다. 그 결과 ‘불치병 멜로’와 ‘막장 드라마’가 넘쳐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는 격정만 있을 뿐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 노부부는 일상을 소소한 로맨스로 채우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일상적이기에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라니, 얼마나 환상적인가! 노부부의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판타지의 느낌을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은 자식들이 다투는 장면이다. 영화는 현전하고 있으되 이미 믿을 수 없는 것이 돼버린 ‘천국의 가려진 상태’를 엿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체험시킨다.

누구나 사랑을 갈구하지만, 연애는 스펙이고, 결혼은 ‘남자의 불편과 여자의 불안’이 결합된 생존 전략이며, 기러기부부에서 보듯 부부는 자녀 양육을 위한 기획물로 변질되었다. 노부부는 의리로 살거나 그마저 없으면 황혼이혼에 나섰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젊은이들에겐 그런 이야기조차 남의 것이다. TV에는 연예인들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를 키우는 일상을 비추는 관찰 예능이 넘쳐난다. 현실에서 체감할 수 없는 일상의 행복이 연예인들에 의해 대리 구현되는 것이다. 시청자도 이것이 허구임을 안다. 다만 사랑에 대한 갈망을 버릴 수 없기에 이를 습관처럼 보는 것이다. 그런데 노부부의 진짜 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관객이 끝끝내 버릴 수 없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희구와 현재의 결핍을 강력하게 증폭시키며 드러낸다. 지금 외로운 자,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부러움과 뉘우침의 눈물을 쏟는다.

어딘가 있는 천국의 모습 아닐까?

올해 세월호를 비롯한 죽음의 외상과 경제난으로 인한 고통도 영화의 흥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순정한 사랑을 그린 불치병 신파 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영화는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주는 역할을 했고, 관객은 어두운 극장에서 마음 놓고 울면서 불안과 울분을 해소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겐 그런 순정한 사랑 영화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류의 허세 쩌는 신파가 아닌, 진솔하고 담백한 감동을 주는 영화를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6명의 아이들에게 입힐 내복을 고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세월호 유족들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죽음 이후에도 사랑이 지속된다는 믿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 강하고 애틋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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