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상을 뒤집어엎다가 눈물 콧물 흘리게 만드는 4컷 만화 는 묘한 작품이었다. 백수건달에다 걸핏하면 상을 뒤엎는 남자 이사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유키에. 왜 그녀는 그를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는가? 박복한 여자 유키에의 불행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럼에도 인생엔 의미가 있음을, 사랑의 다른 말은 헌신과 신뢰임을, 자학이 마침내 시가 되는 기적을 ‘기승전-상 뒤엎기’라는 4컷의 변주로 보여주는 솜씨가 대단했다. 방심하다 한 방 맞은 기분. 위악을 떨던 사람이 알고 보니 피부가 없는 듯 여리고 착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발견한 것 같은.
그랬던 고다 요시이에의 새 작품 두 편 (세미콜론 펴냄)가 나왔다. 각각 2010년, 2012년 작품. 위악은 사라지고 유머는 싱거워졌지만 이야기는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착해졌다. 고다 선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용서하는 신, 사랑하는 로봇는 우주의 창조주가 지구로 내려와 겪는 이야기다. 우주에선 전능한 신이지만 물질인 몸을 입고 온 이상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신이다. 깡통 머리에 이빨은 4개뿐. 비천한 몸으로 온 이유는? 물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천사들이 의회를 열었다. 지구인은 환경파괴에 전쟁을 일삼고, 차별과 격차로 점점 비참해지고 있다. 핵폭탄에 생명의 영역까지 건드려 DNA를 조작하고 복제생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사해볼수록 인류 따위는 없는 편이 낫지 않나, 표결을 거쳐 지구를 통째로 멸망시키기 일보 직전. 신이 나섰다. “지구인의 좋은 점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자고. “지구인에게도 분명 좋은 점이 있을 겁니다.”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엔 온통 없음이었다. 없음은 없음으로 있는 것이 점점 참을 수 없어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구의 히키코모리가 “당신과 관계없잖아!”라고 말할 때 우주의 존재는 부정되고, 안드로메다 날다람쥐의 제3행성 히히다스가 소멸해 없음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관계있다. 하물며 지구가 사라진다면!
신은 모든 생물이 사랑을 갈구하며 살도록, 사랑을 표현하며 살도록 만들었다. 사랑으로 관계 맺는 본성대로 살게 된다면 구제불능의 지구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은 오직 용서다. 나쁜 사람도 이상한 사람도 용서한다. 용서해도 나쁘게 굴면 또 용서한다.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니까. “우주의 중심에는 시공의 틈이 있는데, 그 안에는 우주 악어가 우글우글하지. 무섭긴 하지만, 난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해. 우주 악어에게 온몸을 뜯어먹히면서 나는 용서합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천 번 외치는 거야. 그러면 시공의 틈에서 갑자기 꽃이 피어나고,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전 우주가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는 거야.”
온갖 비극을 겪고 난 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로봇을 만들었다. 의 배경은 인간형 로봇이 인류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미래의 지구. 역시 전쟁과 살육과 기아로 신음하며 글로벌 기업이 착취를 일삼는 그 지구다. 더 이상 인간이 서로 제공해주지 못하는 사랑과 봉사와 헌신을 로봇이 대신한다. 인간의 나쁜 속성을 빼고 변치 않는 마음을 인스톨했다. 근면성실하며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한다. 주인의 자살을 막기 위해 동반자살을 택하는 애인로봇이 있는가 하면(로봇 동반자살), 죽은 주인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자신의 메모리를 가전제품에 조금씩 나누어 담고 사라지기도 하고(린의 추억), 인간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열등하게 제작된 자신의 운명을 한없이 긍정하기도 한다(열등 로봇 열등군). 그것이 “기능이든 뭐든 좋아. 이렇게 엄청난 애정이 또 있을까”.
인간의 동일성을 유지해주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다 요시이에의 로봇은 그런 것 같다. 메모리를 삭제해도 선한 본성이 남는다.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존재인 것이다. 그 말은 곧 인간은 선한 존재를 원한다는 것. 그런 로봇이 인간에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좋은 것에 마음을 쓰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정말로 행복한 길을 걸어주길 바란다.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불행이 누적되면 인간은 유머를 잃는다. 웃음이 더 이상 방어기제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다 요시이에는 자연이 가져온 대참사와 인간이 일으키는 온갖 비극을 겪으며 에두르지 않고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우리에겐 사랑과 용서가 필요하다고. 세상이 악한데, 비극을 막을 수 없는데, 왜 착하게 살아야 하냐고 항변하는 주인공에게 “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지구의 선행이 빛의 그림자가 되어 1200년 후, 1200광년 떨어진 행성의 누군가에게 가닿기 때문이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작가는 지구인에게 희망이 있음을 믿는다, 믿고 싶다,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김송은 만화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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