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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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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지운 산업화와 ‘대한민국’의 아버지

<국제시장>, 자신의 아버지 세대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중년이 된 감독들의 발버둥과 그 실패
등록 2014-12-10 15:09 수정 2020-05-03 04:27
영화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를 통해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그 실패이다.  (주)JK필름 제공

영화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를 통해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그 실패이다. (주)JK필름 제공

은 노인이 된 덕수(황정민)의 회상에서 출발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의 피란민이었던 덕수 가족은 가까스로 미군 군함에 오른다. 하지만 덕수는 여동생을 놓치고 아버지와도 헤어진다.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부산에 온 덕수는 아버지의 유훈인 ‘가장의 책임’을 새기며 자란다.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1963년 파독 광부가 된 덕수는 죽을 고생을 하다가 파독 간호사 영자(김윤진)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한다. 뒤늦게 대학에 가려던 덕수는 1973년 다시금 가족을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기술자로 갔지만 부상을 입고 돌아온 덕수는 1983년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아버지와 여동생을 찾으려 한다.

우리가 도외시했던 아버지들의 개고생

은 한국전쟁에서 시작해 파독·파월과 이산가족찾기를 아우르며,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던 산업화 세대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정주영,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등 실존 인물의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덕수란 인물 또한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걸뱅이’ 소리를 듣던 덕수가 자신을 희생한 덕에 덕수의 가정이 온전한 중류 가정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듯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산업화에 나선 우리 아버지들의 고생 덕분에 대한민국이 ‘정상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덕수는 산업화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영화는 ‘산업화 세대에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심지어 윤덕수와 오영자는 윤제균 감독의 실제 부모님 이름이라고 한다.)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도외시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개고생을 보여줌으로써, 세대 간 화합에 이바지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읽힌다. 실제로 영화는 중년층은 물론 노년층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흡입력을 지닌다. 특히 흥남부두 장면이나 독일 탄광 장면, 이산가족찾기 장면 등은 기억의 재현이란 측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며, 황정민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가히 놀랍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가 건네는 세대 간 화합이란 메시지는 스크린 안쪽에만 머물 뿐 급속히 휘발돼버린다. 왜 그럴까? 덕수는 현대사를 관통한 산업화 세대의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세대 간 화합이라는 이상에 걸맞게 평면적으로 가공된 인물이다. 영화는 4·19 등 정치적 사건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하기야 생존을 위해 박박 기던 노동계층에게 정치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4·19보다 파독이나 파월이 훨씬 중요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정치를 사유할 짬이 없었다. 그 결과 일정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와 구별되는 산업화 세대의 반동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완전히 표백해버린다.

덕수는 파독 경험을 바탕으로 이주노동자를 놀리는 청소년들을 혼낸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베트남인들을 돕는다. 개인적 인연을 이유로 부산에서 홀로 남진을 응원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산업화 세대의 정치적 무의식은 그런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북에서 월남해 “빨갱이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뒤 지독한 반공주의자가 되기 십상이었고, 베트남에 가서는 미군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반공주의자로서 학살에 가담하기 쉬웠다. 파독 경험은 차별에 대한 원한으로 오히려 이주노동자를 멸시하게 만들기 쉬우며, 개인적 선호가 지역감정의 벽을 넘기도 힘들다. 영화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 ‘애국심 투철’의 도장을 받아야 했던 산업화 세대의 초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이 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반동성을 전혀 모른 척한다.

진짜로 난감한 아버지는 ‘꼴통’ 아버지

은 와 더불어, 중년이 된 감독들이 자신의 아버지 세대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발버둥과 그 실패를 보여준다. 는 1970년대 정치적 폭압으로 자신을 김일성과 동일시하는 망상에 빠진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난감함을 담는다. 1990년대 자본의 폭압을 견디던 아들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광기가 합목적적으로 발현되는 광경을 보며, 아버지의 광기가 배태된 연원과 맥락을 짐작한다. 그는 아버지를 연민함으로써 이해하고 마침내 떠나보낸다. 그러나 진짜로 난감한 아버지는 김일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남한 사회에서 현실적인 힘을 망실해버린 ‘미친’ 아버지가 아니라, 박정희와의 동일시를 통해 남한 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미치려고 하는 ‘꼴통’ 아버지들(이를테면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다. 영화는 폭압의 피해자가 자신을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기이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다 과잉의 메타포에 빠져 핵심을 지나쳐버렸다. 은 반대로 간다. 산업화 세대의 아버지들을 정치적으로 탈각시킨 뒤,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하며 연대하는 환상의 주체로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자 ‘역지사지의 달인’이자 ‘생득적 민주시민’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산업화의 역군이자 독재를 경험한 아버지들은 권력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의 미친 아버지도 아니고 의 양순한 아버지도 아닌, 반동적 주체가 되어 여전히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섣불리 세대 간 화합을 말하기 전에 진짜로 화합할 수 없는 이유를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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