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밀가루 끊기를 시작한 데는 좀 지저분한 이유가 있다. ‘장 트러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잘 체하고 소화가 원활하지 않은 못난 ‘장’ 때문이려니 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20대는 복통과 체기를 안은 채 그럭저럭 흘렀다. 30대는 달랐다. 그럭저럭 넘어가지 않았다. 여러 날 복통으로 시달리기를 몇 번 반복하고서야 내 몸이 아우성치는 이유를 찾아나섰다.
누구나 느끼는 스트레스는 큰 변수가 아니었다. 왜냐? 항상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있으니까. 몸이 아프지 않을 때도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변수를 제거하고 나니 남는 것은 하얀 악마, ‘밀가루’였다.
그러고 보니 20살에 하숙·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밀가루 음식을 자주 먹게 되자 ‘장 트러블’을 자주 겪은 것이었다. 동기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짜장면·피자를 시켜먹는 것은 다반사, 밤에 출출할 때면 라면이 빈속을 채웠다. 어설픈 자가 진단의 결과는 한의원 진맥을 통해 확실해졌다. 체질에 가장 맞지 않는 식재료 중 하나가 밀가루로 드러났다. 풀리지 않았던 사건의 범인을 찾아낸 것처럼 속 시원했다.
수제비와 칼국수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다. 곤란한 경우도 많다. “비가 오니 이럴 땐 바지락칼국수지.” 누군가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이야기를 꺼낸다. 밀가루 끊기 초반에는 그냥 일행을 따라가서 밥을 따로 시켜먹었다. 그러나 칼국수 전문점에서 제대로 된 다른 메뉴는 찾기 힘들었다. 이제는 당당히 이야기한다. “저는 밀가루 음식, 특히 칼국수나 수제비는 아예 안 먹어요”라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자주 만나는 동료들은 이제 체념한 눈치다.
밀가루 끊기를 통해 터득한 것 중 하나는 ‘거절하기’다. 음식도, 부탁도, 사람도 받는 대로 소화시키려다간 탈이 생긴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절해야 한다. 더불어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마음 편하지 않은 세상에, 속이라도 조금 편하게 살았으면 한다. 밀가루 음식 끊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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