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시대였다. 학교에서 배운 ‘운수 좋은 날’은 한 개인의 슬픈 가족사와 반전이 있는 하루 정도지만, 현진건 선생님이 소설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1920년대 식민지 경성은 사진으로만 봐도 눈물 나는 비참한 도시였다.”
10년 만들고 10년 상영회 하고한국 단편소설 세 편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애니메이션 의 안재훈 공동감독은 세 편 중 한 편인 ‘운수 좋은 날’과 소설가 현진건의 속내를 이렇게 읽었다.
안재훈 감독은 2011년에 아내인 한혜진 감독,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 식구들과 함께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이라는 ‘소중한’ 애니메이션을 내놓았다. ‘연필로 명상하기’는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도 해체 이야기가 나오는 마당에 한국에서 꿋꿋하게 2D 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스튜디오다. 은 지난 6월 3주년 상영회를 열었다. 적어도 작품을 만든 기간인 10년 동안은 상영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매년 기념상영회를 하고, 그 상영회에 새로운 관객과 옛 관객이 찾아드는 현상은 많은 것들이 빠르게 잊혀져가는 요즘 보기 드문 일이다.
안재훈 감독은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을 통해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에는 1980년대 가요 김만수의 이 있고, 지지직거리는 라디오가 있고, 카톡 메시지 대신 여고생들이 책상 너머로 던지는 쪽지가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 에는 그보다 더 옛날인 1920~30년대 한국의 풍경과 사람이 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얗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어쩌면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소금을 뿌린 꽃밭’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장은 이 한 문장이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비롯한 봉평 메밀꽃밭의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 안재훈 감독은 이 이미지에 대한 기대감을 그대로 재현한다. 수천 송이는 됨직한 메밀꽃은 한 송이 한 송이 연필로 그렸다. 허 생원과 조 선달과 동이, 그리고 나귀 세 마리가 달빛 맞으며 메밀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길을 걷는 장면은 그래서 벅차다.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70리 길 역시 소설을 되살렸다. 안 감독은 “우리 산의 눈높이는 윽박지르지 않는 사람의 눈높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근사한 나무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참 정겹다. 조 선달·동이 같은 인생의 동료와 이 길 걷고 저 개울 건너며 70리를 걷는다면 근사할 것 같지 않나. 밑천 떨어질 때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할 것 같은데”라며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는 일을 ‘근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소설 생명력 살려 두 세대가 대화하도록‘봄봄’에서는 판소리를 통해 원작 소설 대부분의 문장을 온전하게 담았다. 성례를 시켜준다는 장인의 약속만 믿고 3년7개월간 데릴사위로 우직하게 일해온 주인공의 사정이 국악인 남상일의 판소리에 녹아든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했다가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라는 순박한 마음씨와 해학은 정겹다.
‘메밀꽃 필 무렵’과 ‘봄봄’에 향수가 있다면, ‘운수 좋은 날’에는 시대의 상처가 재현돼 있다.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인력거꾼 김 첨지의 이상하게 운수 좋은 하루를 따라가다보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다. 하루 종일 구름 낀 경성의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김 첨지에게서는 쇠약한 가난한 기운이, 그 아내에게서는 병약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요즘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재현하는 1920~30년대는 판타지다. 모던하고 예쁘다. 하지만 실제 그 시대의 모습은 그게 아니다. 옛날 사진을 보면 세련된 외국인 사이에 있는 한국인의 차림새가 너무 슬프다. 솜으로 둘러싼 게 옷인지 뭔지 알 수도 없다. 하물며 고종 황제의 복장도 초라하다.” ‘운수 좋은 날’의 경성이 을씨년스러운 이유다. 안 감독은 신문사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게재했다가 신문사에서 쫓겨났음을 상기시킨다. “현진건 선생님이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술을 드셨다고 한다. 일본인이 있으면 자리를 떴다. 그가 바라본 경성은 얼마나 비통했겠나.” 나무토막 같은 죽은 아내의 얼굴에 떨구는 김 첨지의 눈물방울에는 그 비참함이 담겨 있다.
안재훈 감독이 한국 단편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한 건,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소설들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는 너무 빠르게 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단편 문학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순원의 ‘소나기’, 김동인의 ‘무녀도’ 등도 같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업하고 있는 이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역시 한국의 정령들이 모두 사라진 도시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에 이어 끊임없이 사라져가는 한국적인 것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뭘까.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모두 잊혀질 것이다.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고 나와 같은 것을 읽고 나와 같은 것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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