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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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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겨져 있던 왕피천의 맑은 얼굴

인공의 손길 피한 60km 이르는 자연하천 주변은 반딧불이·삵·담비 등이

노니는 곳… 마을 주민이 주체 되는 생태여행지로 발돋움할 예정
등록 2014-08-01 15:11 수정 2020-05-03 04:27
왕피천은 국내 마지막 자연하천으로 2005년 환경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왕피천은 국내 마지막 자연하천으로 2005년 환경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꼭꼭 숨어 있다.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첩첩산중에 파고들어 있다. 국내 마지막 자연하천인 왕피천(경북 울진군)의 실체다. 하천이지만 계곡 못지않게 깊은 산간의 물줄기다. 왕피천은 상류 쪽이든 하류 쪽이든 접근이 쉽지 않다. 몇 굽이 산골을 거쳐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감춰진 것처럼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기에 거의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유지됐다. 더불어 개발의 손길로부터 지금까지 지켜져온 것이다. 왕피천은 상류부터 하류까지 1급수에 가까운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인간의 길 허락지 않은 상류~중류 구간

왕피천은 상류, 중류, 하류에 각각 마을이 있다. 세 권역으로 나뉜 마을들이 모두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지다. 상류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일대다. 외지에서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계속 파고들어야 수비면에 들어간다. 대중교통은 말할 것도 없고 승용차로 가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품과 시간을 들여서 들어가면, 수비면 수하리의 산속에 유유히 흐르는 왕피천 물줄기를 만날 수 있다. 상류의 수하리 마을에서는 밤마다 왕피천의 청정함을 밝혀주는 듯 반딧불이가 반짝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송방, 오무까지 들어가면 영양 수하리 마을이 끝이다.

왕피천의 상류인 수하리부터 중류인 왕피리까지 인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다. 물줄기만 허락할 뿐, 인간의 길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로는 물론이고 일체의 인공적인 것은 없다. 물줄기만이 산속을 헤쳐가듯 굽이굽이 흘러 내려간다. 왕피리 속사마을에서 하류의 구산3리 굴구지까지도 인적이 없다. 그래서 전체 하천의 길이에 비해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 꽤나 길다. 과거 댐 논란이 벌어진 동강처럼 왕피천은 중간중간에 사람이 살지 않고, 접근이 쉽지 않았던 물줄기가 곳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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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은 상류 이상으로 중류와 하류의 수질도 맑고 깨끗하다. 무수한 협곡과 여울이 자연 정화기 역할을 하고 여기에 곳곳에서 왕피천 본류로 유입되는 골짜기의 청정한 계곡물이 보태져 수질이 일정하거나 하류가 더 맑은 경우도 있다.

60km에 이르는 하천 대부분이 개발의 압력으로부터 지켜져 ‘자연하천’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연어와 은어가 회귀하고 수달·담비·산양·삵 등의 터전이다. 2002년까지 건설교통부의 댐 건설 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2005년 환경부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댐은 물 건너갔다. 이후 왕피천은 미래 세대에게 자연하천을 영원히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왕피천의 중류 지역에는 왕피리가 펼쳐진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녹록지 않다. 차가 다니기 전에는 30리 이상 발품을 팔아야 오갈 수 있었다. 이런 옛길이 4곳 이상 있었으나, 이제는 왕피리를 박달재 한곳으로만 다닌다. 왕피리로 들고 나는 길은 울진군 서면 삼근리에서 출발해 박달재를 넘는 것이 유일하다. 삼근리에는 왕피천생태경관보전지역 탐방안내소와 환경부 왕피천출장소가 있다. 하지만 삼근리∼박달재∼왕피리 사이에는 정기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없다. 그래서 왕피천을 살펴보려면 삼근리에서 출발해 박달재를 넘는 12km 이상 되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걷거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

숲으로 변한 옛길 사이 다랑논

포장도로지만, 박달재를 넘는 길의 풍광은 그윽하다. 숲터널이 곳곳에 나타나고 고개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통고산과 북쪽의 세걸산, 응봉산 자락 등이 펼쳐지며 남한에서 가장 울창한 금강소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박달재고개에 있는 생태경관보전지역의 초소에 이름 석 자를 기입한 뒤, 또 다른 숲 속의 길로 빨려드는 듯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포장도로지만 쾌적함과 수려함이 손색없는 길이 이어진다. 길은 골짜기를 따라 왕피리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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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자단이 왕피천 생태탐방로에서 멸종위기동물인 산양의 똥을 발견해 관찰하고 있다.

청년기자단이 왕피천 생태탐방로에서 멸종위기동물인 산양의 똥을 발견해 관찰하고 있다.

왕피천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왕피리 마을이 나타난다. 왕피리에는 흐르는 물길과 정지된 듯한 농촌 경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다랑논과 몇 뼘 안 되는 밭도 날이 선 듯한 산세와 유유히 흐르는 물길 사이에 어우러져 있다.

왕피천과 애환을 함께해온 왕피리는 포장도로가 이어진 것을 제외하면 아직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식당도 매점도 없고, 그나마 여름 한철 재미를 보았던 민박집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뒤 취사·야영이 금지돼 관광객이 줄었다고 한다. 중류의 왕피리에서 하류 구산3리 사이에도 물줄기뿐이다. 다만 2009년 환경부에서 조성한 생태탐방로가 있어 걸어서만 중류와 하류를 오갈 수 있다. 왕피리에서 출발하면 대중교통과 큰길이 있는 서면 삼근리까지 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구산3리 굴구지 마을에서 출발해 중류인 왕피리 속사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회귀한다. 그렇지만 이 코스에서 왕피천의 자연경관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젠 집터와 농경지터만 남아서 하천변 숲으로 변한 상천동 마을터를 비롯해, 용소와 학소대와 거북바위까지 물길을 품은 한 폭의 동양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하류에는 굴구지 마을과 더불어 수곡리도 있다. 마을 앞 드넓은 논이 죄다 유기농을 하고 그 앞에 왕피천이 흐른다. 마을 뒷산엔 옛길의 원형을 고스란히 품은 한티재가 있다. 이 길에는 산간농업의 터전이던 60마지기 다랑논이 숲으로 변한 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왕피천은 무궁무진한 생태환경과 문화역사를 간직한 미지의 땅이다. 남한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오지 사이로 자연하천이 흐르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원형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그 물줄기와 산림 속에 옛길과 화전민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채 시간이 정지된 듯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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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왕피천은 자신의 속살을 세상에 쉽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접근이 어렵고 오지라는 특성 때문에 사람이 드나드는 데 여러 불편함이 남아 있다. 더구나 왕피천 물줄기를 품고 있는 곳은 국내에서 가장 험한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지형이다. 그래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굴구지에서 출발하는 생태탐방로 등 제한된 탐방로 이외에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9월 말부터 예약가이드제도 운영

그래서 왕피리, 삼근리, 구산3리, 수곡리 등 울진 왕피천 유역 4개 마을 주민들과 울진군, 환경부는 왕피천에서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왕피천의 생태와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지와 자연하천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생태관광을 모색하고 있다. 9월 말부터 예약한 탐방객을 교육받은 생태해설사와 가이드가 동행해 왕피천을 안내하는 예약가이드제도를 운영할 계획이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와 뉴질랜드 밀퍼드처럼 탐방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생태관광의 원칙을 적용하려는 것이다. 지역 주민이 직접 안내해 방문자에게 오지가 무엇인지, 자연하천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려 한다. 국내의 생태보전지역에서 명실상부한 생태관광이 열리는 것이다.

울진(경북)=글·사진 탁지은·정민정·한나연·오보름 생태관광 청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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