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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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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핏, 다시 입는 개성

2차 대전 참전 군인들 재킷, 셀비지 청바지 등 20세기 초 의류 재현한 ‘복각 패션’의 미덕
등록 2014-07-19 16:05 수정 2020-05-03 04:27
미국 몽고메리워드사의 1937년 오버올 광고. 20세기 초에 제작된 청바지와 작업복은 복각의 대상으로 인기가 높다. 박세진 제공

미국 몽고메리워드사의 1937년 오버올 광고. 20세기 초에 제작된 청바지와 작업복은 복각의 대상으로 인기가 높다. 박세진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때 참전 군인이 입던 코트, 미국 대공황 시절 철도노동자가 입던 작업복을 재현한 옷들이 있다. KBS 예능 프로그램 에서 김주혁이 종종 입고 나왔던 점퍼는 1940년대 초반 바닷바람 씽씽 불고 추운 날에 입으라고 미국 정부가 해군에 지급했던 N-1 덱 재킷의 복각이고, 접은 바짓단 위로 빨간 실 자국이 선연한 셀비지 청바지 역시 20세기 초반에 나오던 청바지를 재현한 옷이다. 요 몇 년간 외국의 남성 패션 커뮤니티는 물론, 국내 패션 커뮤니티에서도 화제는 ‘옛날 옷’이다. 패션계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복각’과 ‘재현’이다.

우리가 입는 옷의 직접적인 조상

복각이란 어떤 원형을 재현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원형은 청바지나 기능성 의류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20세기 초·중반의 옷을 말한다. 이 시기에 세계대전과 그 복구 과정을 거치며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면서 현대적인 의류가 나타났다. 즉,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복각 패션의 중심은 단연 청바지다. 하지만 청바지라고 다 같은 청바지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셀비지 청바지의 원단은 옛날 방직기로 만든다. 일본에 구형 셀비지 원단을 만드는 회사가 몇 곳 있는데 주로 도요타차동차의 전신인 도요타자동방직기 회사에서 1920년대에 내놓은 ‘모델 G’라는 자동방직기를 사용한다. 이 기계는 1970년대까지 사용되다가 훨씬 빠르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신형 기계에 밀려났다. 그러다가 복각 패션이 유행함에 따라 복각을 한다 하는 곳은 너도나도 이 ‘모델 G’를 들여놓고 있다. ‘로 데님’이라고 불리는 청바지는 거친 원단을 그대로 사용한다. 줄기차게 입고 다니면 각자의 사용 패턴에 따라 닳아가면서 자기만의 청바지가 완성된다. 매끈하게 딱 떨어지고 입기에도 편한 최신 청바지보다 훨씬 멋스럽고 개성이 넘친다. 셀비지 데님은 꽤 대중화돼서 대중 브랜드인 유니클로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복각 패션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80년대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PX(군부대 내 매점)에 납품하던 오리지널 청바지를 그대로 다시 만드는 ‘슈가케인’이나 ‘존불’ 같은 브랜드가 등장했다. 이런 작업이 일본 문화와 잘 맞았는지 이와 비슷한 형태로 구형 작업복이나 군복을 복원하는 ‘버즈릭슨’ ‘리얼매코이’ 같은 브랜드도 나왔다. 그 뒤 일본에서 ‘아메카지’(‘아메리칸 캐주얼’의 일본식 표기)라는 이름이 붙는 복각 트렌드가 만들어졌다. 한때 일본 면 생산의 중심지였던 고지마 지역 주변으로 옛날 방직기를 가지고 있는 데님 공장이나 최상급 셀비지 청바지를 생산하는 브랜드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서구의 젊은이들이 고지마 지역에 와서 데님을 배우고 복각된 의류를 입어본 뒤 다시 미국이나 유럽 등 본국으로 돌아가 비슷한 느낌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텐더’나 ‘로코토프’, ‘블랙앤데님’ 같은 회사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수입과 역수출이 거듭되면서 여러 문화가 뒤섞이고 ‘복각 패션’ 분야는 더욱 탄탄해졌다. 그리고 그 흐름이 한국으로까지 넘어왔다.

복각은 옷을 만드는 방식이 기존 의류와 다를 수밖에 없다. 기존 옷을 연구하며 원단을 만들고 염색 원료를 재현하고, 부자재까지 재현한다. 옛날 군용 점퍼에는 ‘크라운’이라는 회사에서 제작한 커다란 지퍼가 사용된 게 많았다. 추운 날 장갑을 끼고 지퍼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두껍고 무겁고 크게 제작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정교한 복각을 추구하는 몇몇 회사는 어딘가 창고에 묵혀 있던 크라운 지퍼가 발견이라도 되면 그 지퍼가 달린 복각 의류를 스페셜판으로 내놓는다. 말하자면 ‘진짜’가 붙어 있는 복각 의류다. 그게 안 되면 원본의 소재를 분석해 금속 함량까지 똑같이 해서 지퍼를 다시 제작한다. 마치 과학자와도 같은 철저함이 복각 패션 특유의 미덕이다.

특유의 거친 느낌을 스타일리시하게

복각 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미덕을 즐긴다. 골동품 수집가처럼 방직회사별 원단의 특징이나 차이를 숙지하고, ‘리얼매코이’와 ‘버즈릭슨’이 내놓은 탱커 재킷(영화 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택시 운전을 할 때 입던 군복)의 복각판을 비교하며 어느 회사가 무엇을 강조했고 무엇을 왜 뺐는지도 논의한다. 패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고 ‘멋지다’라는 것이 기준 없는 모호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복각의 세계에선 통하지 않는다. 패션에 딱히 조예가 없어도 원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근접성’을 객관적으로 표시할 수 있다. 프라모델의 정밀함이나 스마트폰의 기능, 자동차의 성능을 평가하듯 옷에 대해 뭐라도 할 이야기가 있는 분야가 ‘복각’이다.

복각은 현대식 의복의 뿌리에 해당하는 ‘옷의 원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한 사람들, 그런 옷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거친 느낌을 스타일리시하게 소화해보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을 코스프레하는 것과는 옷을 대하는 방향과 태도가 다르다. 게다가 대량생산되는 대기업 의류 브랜드와 비교하면 옛날 방직기로 천천히 소규모로 작업하다보니 제3세계 노동 착취 문제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이런 패션에 대해선 사람마다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만약 호기심이 동하는 쪽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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