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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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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먹은 말이 천리를 가는 법

‘조금 덜떨어진’ 인간이 한 가족을 싸안고

시대를 관통하는 풍경,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
등록 2014-07-18 17:54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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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 은 평범을 비범으로 끌어올리고 그 상승운동의 정점에서 장렬하게 스러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소설 주인공 김만수는 3남3녀 중 넷째. 위로 형과 두 누나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다.

형·누나와 남녀 동생이 두루 있으니 형제 중에서는 평균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는데, 외모와 두뇌는 그중 떨어지는 축에 든다. 그러나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키더라고, 끝까지 부모·형제와 집안을 건사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만수다.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키호테의 로시난테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이런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만수의 삶을 비추는 횃불이 되었다.

소설은 만수 주변 인물들이 차례로 화자로 등장해 자기가 겪고 목격한 만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남들 보기에 만수는 비록 영리하지 못하고 용모도 보잘것없지만 심성만은 착하고 순하며 이타적이다. 큰누이 금희가 본바 어린 만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이라도 부시고 할아버지한테 가서 잘 주무셨는지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와서 돼지며 닭이 제 먹을 것 찾아 밖으로 가도록 문도 열어주고 제 손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는 설거지물 버리는 것도 도와주고 비 오면 빨래도 같이 걷었다.”

“식구가 죽으면 네가 죽는 것이다”

이런 면모는 나중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서, 그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심신이 망가진 둘째누이 명희며 행방불명된 동생 석수가 남긴 사생아를 떠안아 챙기는가 하면 여동생의 식당 일을 혼신을 다해 돕되 제 몫과 이득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식구는 너의 분신이고 너의 뿌리이고 울타리이다. (…) 식구가 죽으면 네가 죽는 것이다”라는 조부의 말씀이 그의 행동을 이끌었겠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족이기주의로 폄훼할 것도 아니다. 만수는 회사의 경영난으로 실직 상태에 놓인 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빠진 회사 동료와 그 가족들을 제 식구처럼 챙기는데, 그러할 때 만수가 생각하는 가족은 ‘확대된 가족’이며 그가 실천하는 가족애는 말하자면 인류애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1960년을 전후해 태어난 만수의 2010년대 현재까지의 생애 전부가 서술되기 때문에 이 소설에는 반세기 남짓한 한국 사회 전체의 변모가 착실하게 투영돼 있다. 베트남전쟁과 산업화, 1980년대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그리고 구조조정과 대량 실직 사태 같은 굵직한 사건과 흐름은 물론 혼분식 장려와 회충 검사, 고엽제 피해, 연탄가스 중독, 뇌물 교통경찰, 최루탄 냄새와 왕따 같은 습속 및 사회사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절 우리가 거쳐온 풍경과 초상을 만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이기적 인물 석수의 ‘만수 선언’

“여자 어린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남자아이들은 벽을 치며 울었다. 어떤 아이는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서 울기도 하고 누워서 우는 아이도 있었다. 창을 향해 돌아서서 조용하게 우는 아이도 있었고 목 놓아 통곡하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도 울고 학부형들도 울었다.”

1960년대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식 풍경을 묘사한 이 ‘웃픈’ 대목을 비롯해 성석제 특유의 입담은 여전하다. 소설을 열고 닫는 관찰자 겸 화자는 만수의 남동생으로 그와는 달리 극도로 이기적인 인물 석수. 사생아만 남긴 채 사라졌던 그가 만수와 한강 다리에서 마주치는 장면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발표되는 ‘만수 선언’에 작가의 창작 의도가 함축돼 있다.

최재봉 문화부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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