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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청에서 필생의 친구를 만나다

정민 교수가 미국에서 건진 ‘후지쓰카 장서’ 탐험,

18세기 조선-청 지적 교유의 풍경
등록 2014-07-18 15:5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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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어느 날,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그 유명한 옌칭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1년 방문학자로서였다. 이날 그는 우연찮게 ‘망한려’(북한산이 바라다뵈는 집)란 당호를 쓰는 이가 필사한 이란 책을 찾아냈다. 정 교수는 조선 북학파의 선구자 담헌 홍대용(1731~83)이 청나라 선비 엄성(1732~67)과의 만남을 기록한 을 한국에서 가져가 읽던 차였고, ‘엄성’이란 키워드로 검색했다가 찾아낸 책이 엄성의 문집 의 필사본이었다. 이어 두 번째가 엄성과 육비, 반정균 세 사람의 중국 절강 지역 과거시험 답안지를 모은 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 교수는 1년간 이 도서관에서 후지쓰카가 모은 장서 50종 200책을 찾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연암 를 낳은 지적 네트워크</font></font>

을 필사한 망한려는 일제 후반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15년간 있었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 청의 고증학단을 연구하다가, 그들과 교유했던 조선 학자들에게 마음이 이끌려 청과 조선의 학술문예 교류를 필생의 연구주제로 삼았던 인물이다.

은 옌칭도서관 후지쓰카 장서에 대한 정 교수의 ‘탐험’의 기록이자, 이를 통해 드러내는 18세기 조선과 청 지식인의 지적 교유의 풍경이다.

1766년 연행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던 33살 홍대용은 2월 초, 35살 엄성과 그 친구들(48살 육비, 25살 반정균)을 처음 만났다. 얼마나 서로 마음이 잘 통했던지 헤어질 적에 엄성은 “여태껏 지기를 만나보지 못했다”며 울컥했고, 홍대용은 “끝내 헤어져야 한다면 애초 만나지 않았음만 못하다”고 했다. 반정균은 아예 흐느꼈다.

그 한 달 동안 베이징에서 홍대용과 엄성 등은 일곱 차례나 만났다. 헤어진 뒤에도 계속 교분을 이어가 각기 중국과 조선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엄성이 풍토병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엄성의 친구 주문조라는 이가 홍대용에게 편지로 부고를 알렸다. 그 편지엔 엄성이 숨지기 직전 광경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병이 위중하던 저녁, 제가 침상 곁에 앉아 있는데, (엄성이) 그대의 편지를 꺼내더니 나더러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읽기를 마치자 눈물을 떨궜습니다. 이불 속에서 그대가 선물한 먹을 찾아 그 고향(古香)을 아껴 취해 향기를 맡고는 이불 속에 간직해두었습니다.”

홍대용은 답서에 이렇게 썼다. “철교(엄성)가 생사의 와중에 보여준 은혜와 사랑은 천륜의 형제와 다름이 없습니다.”

엄성과 홍대용의 국경을 뛰어넘은 우정은 이후 수많은 한·중 지식인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망을 만들어나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엄성의 친구 반정균은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고 훗날 베이징을 찾은 홍대용의 후배 박제가·이덕무 등과 교분을 이어갔다. 박제가·이덕무가 연암 박지원의 문인 그룹 일원이었기에, 한·중 지식인의 지적 네트워크, 지은이가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 표현하는 네트워크는 를 낳은 연암으로 이어진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북벌 국시는 이념논쟁으로 비화하고</font></font>

홍대용의 청 선비들과의 교유는 북벌이 엄연한 국시이던 당시 주류 유학자들의 지탄을 받았다. 김종후는 “더러운 원수의 땅”을 밟았다고 비난했다. 이른바 ‘춘추의리론’에 입각한 북벌 국시 문제로 넘어가 순식간에 이념논쟁으로 비화했다. 홍대용의 단독 논전은 후배 박제가 등에게 바통이 넘겨지면서 북학의 새싹으로 자랐다고 지은이는 쓴다.

허미경 문화부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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