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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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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경계 안에 갇히지 않았다

제주 올레길과 포개지는 일본 규슈 올레길을 걷다
숨은 공간과 역사 되살아나며 침묵 뚫고 말 걸어오는 길의 이야기
등록 2014-03-12 15:36 수정 2020-05-03 04:27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마쓰오 바쇼)

길을 걷다 길에서 죽은 바쇼(일본 에도시대의 하이쿠 방랑시인)는 검약한 17자의 글자에 삶의 물기와 황량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울음이 보풀처럼 일어 야금야금 증발시킨 몸과 마음이 낭비 없는 언어에 붙잡혀 앙상한 뼈만 남았다. 바쇼의 시대에 번과 에도를 동맥처럼 연결했던 ‘나가사키 가이도’의 출발지에 서서야 남자는 알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탕진하며 흘린 감정이 도처에서 명태처럼 말라갔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도공의 길은 흙의 길이었다</font></font>

일본 규슈 사가현 우레시노는 역참도시였다. 에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묵는 곳이었고, 에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묵는 곳이었다. ‘가이도’를 걸어 누군가는 떠나왔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번주를 따라 노역의 길(도쿠가와막부가 번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격년으로 에도 거주를 명한 ‘참근교대’)에 나선 백성들은 한때 게이샤 100여 명이 활동할 만큼 번성했던 도시를 지나며 제 삶이 눈물겨워 덜컹거리고 흔들렸을 것이다.

규슈에 난 올레길(3월1일 3차 오픈)을 남자는 우레시노(규슈올레 우레시노 코스)에서부터 걸었다. 전날 밤 그의 몸이 우레시노 온천수(일본 3대 미용온천)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뜨겁고 매끄러운 물이 그가 살아온 울퉁불퉁한 시간 속으로 흘러들었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밤낮없이 흘러갔다.(도종환 ‘우기’)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차가웠지만 춥지는 않았다. 밤낮없이 멀어져간 세상에 뒤처져, 남자의 걸음은 속도를 잃고 헛돌았다. 요시다 사라야마 대관소(막부를 대리하는 지방행정기관)를 출발해 도자기 마을을 지나는 곳에 다이조지(대정사)가 있었다. 주지승 마쓰모토 류쇼는 “한반도에서 온 도공들의 뜻을 받들고 요시다 도자기의 번영을 기원하려 세웠다”며 절의 시원을 설명했다. 그 옛날 한반도의 도공들은 잡혀오거나 바다를 건너와 일본에 도자기 기술을 전수했다. 그들이 그릇을 빚은 아리타(규슈 사가현)는 일본 도자기의 본산이 됐다. 아리타의 흙이 고갈되자 도공들은 우레시노의 흙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도공의 길은 흙의 길이었다.

아기를 안은 108명의 지장보살들이 다이조지를 지키고 있었다. 돌로 만든 지장보살들은 포근한 엄마 같았다. 보살들은 가난과 전쟁으로 무덤도 없이 죽은 아기들의 넋을 품에 안아 기렸다. 보살들 앞에서 바람개비가 돌았다. ‘아기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으로 아기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바람개비의 뜻과 쓸모였다. 아기들이 견뎌온 시간도 바람개비처럼 경쾌하게 돌았는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이 아기들에게 꽃을 올렸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함민복 ‘선천성 그리움’)

제주와 규슈는 길 위에서 포개지고 있었다. 규슈의 길 위에 제주올레의 방향 표지와 간세(제주올레를 상징하는 조랑말) 문양이 포개지면서 길은 길을 껴안았다. 남자는 살면서 자신의 심장 위에 포개진 누군가의 심장을 가져보지 못했다. 우레시노의 혈관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지진과 홍수의 두려움을 다독여온 작고 소박한 신사(神社)가 남자를 맞았다. 본래 신사는 군국(軍國)의 것이 아니라 백성의 것이었다. 백성이 여린 마음을 의탁해온 토속의 신사 앞에서 믿음 없는 남자는 자주 걸음을 멈췄다. 규슈는 이미 봄이었다. 노랗게 익은 밀감과 서둘러 핀 매화와 짖는 개의 소란 사이에서 키 작은 노인이 이빨 빠진 얼굴로 순하게 웃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한 번도 휘지 못했을 침엽수의 직선</font></font>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 옆으로 녹차밭이 푸르렀다. 녹차(최근 5년 연속 전국 최우수 선정)는 굽고 휘는 길을 따라 굽고 휘길 주저 않으며 싹을 틔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녹차밭이 은은한 초록의 향을 길에 뿌렸다. 녹차 앞에서 우레시노 농부들은 자부심이 넘쳤다. “마신 뒤 입에 남는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우레시노 녹차의 특징”이라며 농부 야마구치 가쓰키는 찻물을 권했다. 막부 일본을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시킨 사카모토 료마의 여인은 우레시노 녹차와 홍차를 팔아 그의 정치자금을 댔다.

너트에 맞는 스패너를 못 챙겨왔나보다/ 세 번 끼워 돌리면 두 번은 헛돈다/ 그렇게 우리도 수천 번씩 헛돌며 살아왔을 것이다.(송경동 ‘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

탕탕탕. 나무 방망이로 양철통을 두드리고(멧돼지에게 사람의 진입을 알리는 경고) 산길로 들어섰다. 샘물이 솟는 산 중턱에서 수직 암벽을 배경으로 13개의 돌 보살들이 엷게 미소지었다. 길은 기억을 깨웠다. 올레길은 점(명소)을 찾아가는 대신 점과 점을 이어 선을 그렸다. 그 선의 이음 속에서 길은 숨어 있던 공간을 찾아내고 잊힌 역사를 되살려 길의 이야기에 보탰다. 주민들의 추억 속에 묻혀 있던 돌 보살들이 선의 길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흔들렸다면 사랑이었거나 절망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길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왔을까, 흔들리고 헛돌며 걸어온 남자는 자문했다. 빽빽한 침엽수림이 청량한 공기를 뿜어 올렸다. ‘22세기 아시아의 숲’에선 나무와 나무 사이로 투명한 안개가 보일 듯 말 듯 피었다. 사가현과 교류하는 나라들에서 보내준 식물들로 숲은 번창했다. 남자는 한 번도 휘어보지 못했을 침엽수의 직선이 부럽고도 애처로웠다.

길이 장벽도 뚫을 것이라고 믿었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김수영 ‘비’)

바다는 근육 덩어리였다. 파도의 억센 힘줄이 배를 밀었다가, 당겼다가, 조였다. 후쿠오카현 오시마섬(규슈올레 무나카타·오시마 코스)으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남자도 흔들리는 배를 따라 흔들렸다. 6.8km의 바다를 건너 도착한 작은 섬에선 800여 명의 주민들이 해안선에 안겨 살고 있었다.

섬 날씨는 해초처럼 움직이고 바람처럼 나부꼈다. 갑작스런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밀어내고 차가운 비를 뿌렸다. 해안 안쪽에 자리잡은 나카쓰미야(여신 다기쓰히메노카미의 신사)의 주인이 파도를 일으켜 비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나카타의 헤쓰미야(이치키시마히메노카미의 신사)와 오키노시마섬의 오키쓰미야(다고리히메노카미의 신사) 주인들(‘무나카타 삼신’을 모신 세 신사는 통칭 ‘무나카타 대사’라고 불리며 일본 7천여 신사의 총본산)도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원했을까. 첫째 여신 다고리히메노카미는 자신의 섬에 여자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시마섬엔 오키노시마섬에 들어가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참배소가 있었다. 세 신사를 연결한 선이 현해탄을 건너면 한반도의 남쪽에 닿는다고 했다. 그 길을 따라 삼한시대부터 한-일은 바닷길을 열었다고, 오시마섬의 유일한 한국인 박인순씨는 말했다.

돌아보느니, 우리는/ 세상의 반만 가지고 살고 싸웠느냐.(백무산 ‘달’)

신사를 옆으로 끼고 미다케산의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가쁜 숨을 참고 한 발씩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차게 육박해왔다. 정상은 산의 정점이 아니라 바람의 정점일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뒤돌아보면 올랐던 길이 너무 가팔랐다.

‘5년 연속 전국 최우수’로 선정된 녹차는 온천과 함께 우레시노를 대표하는 특산품이다(위쪽). 무나카타·오시마 코스의 오시마섬(후쿠오카현) 해안엔 오키노시마섬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참배소가 있다.

‘5년 연속 전국 최우수’로 선정된 녹차는 온천과 함께 우레시노를 대표하는 특산품이다(위쪽). 무나카타·오시마 코스의 오시마섬(후쿠오카현) 해안엔 오키노시마섬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참배소가 있다.

규슈는 한반도와 밀접한 역사를 가진 땅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성(사가현 가라쓰)에서 임진년 조선 출병을 준비했다. 가고시마는 정한론의 발상지였다. 규슈의 외진 곳에선 아직 떼어지지 않은 선거 포스터에서 아베가 활짝 웃고 있었다. 길은 숨길 수 없는 상처를 직시하는 곳에서부터 열렸다. 규슈올레는 한국인들의 걸음을 염두에 두고 시작된 길이었다. 한-일 관계가 더할 수 없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길은 계속 연결되고 있었다. 길은 길을 걷는 자들이 내고, 길은 경계 안에 갇히지 않았다. 정치가 쌓아올린 장벽을 길이 뚫을 것이라고 길 위를 걷는 자들은 믿었다. 포기하지 못해 붙들고 싸우는 것이 세상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남자는 길에서 깨달았다. 자기를 담은 풍경을 인간의 눈은 조망하지 못한다.

기러기도 마음이 있어 하늘을 서성거린다, 고 그녀는 말한다/ 하늘 끝을 날다 다시 돌아서고 마는 그 그리움의 곡면.

(문태준 ‘기러기가 웃는다’)

과거 표고버섯 농부들이 오가던 길은 인적이 끊기면서 덤불이 점령했다. 덤불을 걷고 닫힌 길을 열었을 때 길 아래로 넓은 바다와 솟은 섬들이 펼쳐졌다. 무거운 것은 바윗덩이가 아니라 마음이었을까. 시야를 가득 채운 수평을 바라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섬의 한복판으로 이어졌다. 인적 없는 길이 때론 아늑하고 때론 아득했다. 아늑하게 뻗은 길로 빨려 들어가다보면 섬을 휘감은 고요함에 아득하게 빨려 들어갔다. 드물게 눈에 들어온 인가 앞에 무인 감귤 판매대가 놓여 있었다. 굵은 대나무를 잘라 만든 동전통 옆에 오시마섬 귤이 먹기 좋게 잘라져 있었다. 개량하지 않은 귤의 맛은 시원하고 썼다. 쓴맛을 감추지 않는 것은 거짓일 리 없다고 남자는 믿었다. “올레길이 열리고 처음 찾아온 사람들이 반가워” 주민 데라시마 히로코는 귤을 잘라 길에 올렸다. 사람이 많지 않은 섬에서 외따로 살아온 그에게 이국의 낯선 사람들은 두려움이 아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흔들리고 눕되 바람에 지지 않는 것들</font></font>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명인 ‘침묵’)

섬의 북쪽으로 오르는 길에 대나무숲이 울창했다. 오래 자란 대나무들은 한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을 만큼 굵어진 뒤 정점에서 늙어 쓰러졌다. 쓰러져 누운 것들도 다시 일어날 때가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익으면 여리고 순한 것들이 언 땅을 뚫고 일어날 것이다. 대나무들로 빽빽한 숲은 하늘이 좁았다. 대나무들은 하늘의 길을 찾으려 곧게 뻗으며 좁은 허공을 비집고 솟아올랐다.

대나무숲을 빠져나오자 눈앞이 환해졌다. 현해탄을 바라보는 높은 언덕까지 하늘과 억새가 맞닿아 길을 이끌었다. 언덕 꼭대기에선 바람이 풍차를 돌렸다. 모자가 날아가고 몸이 밀릴 정도로 바람은 억셌다. 흔들리지 않으려 걸은 길 위에서 남자는 깃발처럼 흔들렸다. 바람 앞에서 뻣뻣하게 버티는 남자의 발밑에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눕고 일어나는 가녀린 풀들이 보였다. 하늘에선 강한 바닷바람에 두 날개를 실은 매 한 마리가 평화롭게 날며 고고하게 유영했다. 흔들리고 눕되 바람에 지지 않는 것들을 남자는 보았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남자에게 한 사람이 물었다. “거기 뭐가 있어요?” 남자가 답했다. “길.” 들끓는 길은 바람 속에서도 침묵을 뚫고 말을 걸어올 것이었다.

규슈(일본)=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font color="#C21A1A">■ 우레시노 코스</font>(12.5km, 4~5시간, 난이도 중상): 요시다 사라야마 대관소 유적지→히젠 요시다 도자기회관→다이조지·요시우라신사→니시요시다 다원→니시요시다의 곤겡불상과 13보살상→보즈바루 파일럿 다원→22세기 아시아의 숲→시바 산소→도도로키 폭포→시볼트 유(공중욕탕)→온천공원·상점가→시볼트의 족탕

<font color="#C21A1A">■ 무나카타·오시마 코스</font>(11.4km, 4~5시간, 난이도 중상): 오시마항 페리터미널→무나카타 대사 나카쓰미야→미다케산 정상→시다케산 등산로→나카쓰와세 숲길→풍차전망대 산책로→포대지→군도→오키노시마 참배소→오시마 커뮤니티→오시마 초·중학교→간스해수욕장→오시마항 페리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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