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6일 개봉을 앞둔<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와 아버지 황상기씨의 법정투쟁을 영화화했다. 영화는 노동자의 안전은 안중에 없는 국가와 자본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OAL 제공
영화 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사건을 그린 극영화다. 박철민·김규리가 주연을 맡고, 1만여 명이 참여한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란 제목으로 공개돼 관객과 외신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영화는 사건의 본질을 짚는 예리하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가족애와 사회정의를 말하면서도 섣부른 신파나 증오에 빠지지 않는 미덕을 보여준다.
첨단과 어울리지 않는 노동집약 산업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한상구(박철민)의 딸 윤미(박희정)는 진성기업 경기도 수원공장에 입사한 지 20개월 만에 백혈병에 걸려 집에 돌아온다. 진성기업에선 사직서와 산업재해 신청을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가며 직원들의 성금 4천만원을 건넨다. 병문안 온 동료들은 윤미와 같이 일한 언니가 백혈병으로 사망했으며, 같은 라인에서 5명이나 더 발병했다는 말을 들려준다. 윤미는 사망하고, 산재 신청은 거부된다. 한상구는 노무사 난주(김규리)의 도움으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다. 진성기업은 한상구에게 10억원을 주겠다며 회유하는 한편, 행정소송에 보조인 자격으로 나서 법정싸움을 주도한다.
삼성 반도체 산재 사건은 2007년 황유미씨가 사망한 뒤, 아버지 황상기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대책위인 ‘반올림’이 꾸려졌고, 지금까지 151명의 피해자가 접수됐고 그중 58명이 사망했다. 황유미씨를 비롯한 5명이 행정소송을 진행해, 황유미씨와 2인 1조로 근무했던 이숙영씨 두 명이 2011년에 승소해 산재로 인정받았다.
삼성 반도체 산재를 둘러싼 싸움은 국가와 자본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조력자를 빼고 황상기씨만 입회시킨 작업환경 측정 조사에서 삼성은 황유미씨 근무 때와 달라진 작업환경을 보여주었고, 언론은 문제없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노동부는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 목록을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실시한 역학조사는 비호지킨 림프종과 백혈병이 본질적으로 같은 병이며, 젊은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가 일반 인구군에 비해 좋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백혈병과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영화는 이같은 문제들을 짚으며, 모든 정보와 권력을 독점한 대기업이 업무연관성을 피해자들에게 입증하라고 떠넘기는 재판이 과연 공정한지 반문한다.
흔히 반도체 산업이라 하면 고도의 첨단기술을 떠올린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은 노동집약 산업이자 화학물질 집약 산업이다. ‘우주복 같은 작업복’이나 ‘먼지 없는 클린룸’은 안전하고 깨끗한 작업환경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노동자 처지에선 그 반대다. 작업복은 노동자에게 유해물질의 오염을 막아주는 게 아니라, 노동자로부터 침이나 땀 같은 오염물질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먼지가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환기도 시킬 수 없어서 유해가스가 그대로 흡입된다.
영화는 이것이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잘 짚어준다. 2003년 미국 IBM사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노동자들이 소송을 냈다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별적인 보상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 IBM 노동자 중 50여 명의 암환자를 비롯해 250여 명의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자가 드러났다. 이후 공장은 제3세계로 옮겨졌다. 대만,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방 소도시 출신 여성노동자들이 발암성이 입증되지 않은 수작업 공정에 투입된다. 회사는 기본급은 적게 주고 성과급은 많이 줘서 경쟁을 유도한다. 노동자들 스스로 보호구를 풀고 작업해 더 많은 물량을 만들게 하고, 문제가 생기면 개인 탓으로 돌린다. 영화는 이러한 대기업의 행태를 상세히 들려주지만, 단순히 악마화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국가기관은 삼성 반도체의 아바타자본은 악마보다 훨씬 촘촘하게 사람들을 포획한다. 영화 속 교익(이경영)은 선진국에서 기술을 배워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일군 엔지니어로 수십 년간 ‘진성맨’이란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는 백혈병에 걸리지만, 회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회사를 통해 자기존재를 인정받아온 그에게, 회사는 곧 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진성의 관리자는 “대한민국을 누가 먹여살리는데”라 말하고,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좋은 회사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감히 대기업에 맞서지 못하는 이유는 느슨하게라도 생계가 연관돼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내면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수출·대기업 중심의 경제 시스템을 계속 끌고 가며 ‘노동지옥, 재벌천국’의 길을 가는 이상 저 환상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진성의 관리자 말처럼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다”. 노동자의 복지를 위한다는 국가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반도체의 아바타인 양, 산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고 싸움은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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