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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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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의 놀고먹는 도적떼

마피아 영화의 대가 마틴 스코세이지가 그려낸
마피아 같은 주식중개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등록 2014-01-25 15:45 수정 2020-05-03 04:27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소수의 몇몇에게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대다수 노동계급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금융자본주의 치졸한 현실을 냉정하게 그려낸다.우리네트웍스 제공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소수의 몇몇에게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대다수 노동계급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금융자본주의 치졸한 현실을 냉정하게 그려낸다.우리네트웍스 제공

허다한 영화들이 언제나 세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영화는 특정한 ‘시대’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대’라는 것이 앞서 존재한다기보다, 영화가 그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펼쳐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서사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신작 도 이런 영화 중 하나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먼 후대에 우리 시대를 증언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이 영화가 그중 하나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자서전 뒤 깨알 같은 반전

그렇다. 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구태의연한 용어와 쌍으로 회자되곤 하는 그 ‘특별한’ 자본주의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만한 영화다. 보고서라고 하니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코세이지가 누구인가. 프랜시스 코폴라가 비정한 마피아의 세계를 그려냈다면, 그 모습 뒤에 감춰져 있는 ‘찌질’하고 치졸한 진실을 사정없이 보여줬던 감독이 아닌가.

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연봉을 수십억씩 받는 월스트리트의 주식중개인을 에 나오는 마피아처럼 그려낸다. 명품으로 도배하고 호화 요트에 승선해 세계를 주유하는 이들이, 사실은 온갖 감언이설로 가난한 이들의 쌈짓돈을 털어가는 도적떼에 불과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또한 현란한 말솜씨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뒤통수에 총질을 서슴지 않는 비열한 이들이라는 진실이 빠른 화면 전개와 함께 드러난다. 얼마나 몰아붙이는지 3시간이 짧을 지경이다. 돈이 생기면 따라오는 마약과 섹스, 그리고 광란의 파티가 시종일관 파도처럼 출렁인다.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던 벨포트라는 실제 인물을 소재로 삼았다. 실제 인물이 등장한다고 과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자체가 압축과 전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꿈-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코세이지가 이런 과장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중요하다. 벨포트라는 인물은 영화에 등장하는 이야기 그대로 월스트리트의 로스차일드 증권사에 들어갔다가 1987년 블랙먼데이 때문에 해고당한다. 그 뒤 그는 ‘페니스톡’(저가 주식)을 사고파는 동네 증권거래소에서 경력을 다시 쌓아 스트래튼 오크먼드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룡남’(개천에서 나서 용이 된 남자)의 자수성가 이야기처럼 들린다. 벨포트의 수기를 토대로 했으니 이런 서사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코세이지는 수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는다. 그래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에 취해 ‘개룡남’의 부침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가도 무방하다. 을 연상시키는 방식이다. 코폴라의 를 이미 봤던 이들에게 전혀 다른 마피아의 진실을 들이대서 꿈을 깼던 것처럼, 벨포트의 수기를 읽고 감명받은 이들에게 스코세이지는 그 이야기에 감춰져 있는 깨알 같은 반전을 하나씩 꺼내 보인다. 금융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쾌락은 마약과 섹스로 표현된다. 벨포트는 영화 초반에 지폐에 코카인을 담아서 흡입한 뒤 ‘중독’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마약과 섹스, 그리고 돈에 중독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미리 복선을 깐다.

지폐에 코카인… 돈에 중독되는 이야기

얼핏 보기에 이런 구성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온갖 지면을 장식했던 폴 크루그먼류의 도덕담론을 연상시킨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조차 부르주아를 일컬어 ‘놀고먹는 도적떼’라고 표현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비슷한 비난이 금융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쏟아졌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 자명한 사실에 대한 스코세이지의 시선일 테다. 분명히 는 크루그먼의 주제를 되풀이하고 있다. 벨포트를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내는 연방수사국(FBI) 형사 패트릭 덴험(카일 챈들러)은 살아 있는 미국의 양심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벨포트의 삶에 가려서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의 비중은 영화 전개 내내 상당히 높다. 추레한 양복을 입고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벨포트의 요트에서 당당하게 맞짱을 뜨는 장면이나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혼자서 지저분한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잠시 꽃무늬에 홀렸던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춘다. 스코세이지는 벨포트와 패트릭을 대치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시선이다. 벨포트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금융자본주의는 순진한 이들을 돈으로 홀려서 나쁜 짓을 저지르게 만드는 인격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다. 그 몇몇에게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대다수 노동계급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바로 그것의 실체다. 이 사실을 영화는 냉정하게 그려낸다. 이 지점에서 스코세이지는 크루그먼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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