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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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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판 사이, 자본주의의 맨얼굴

웃고 즐기자고 만든 게임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등록 2014-01-25 15:41 수정 2020-05-03 04:27

새해 벽두, 평소 사회·정치적 이슈에 사사건건 부딪히던 오늘의 유머, 디시인사이드, 일간베스트저장소의 유저들이 대동단결했다. 지난 1월11일 방영된 (tvN)에서 출연자 이두희가 부당한 방법으로 탈락하게 되었다는 분노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도 그의 탈락이 연예인 친목 연합의 부도덕한 플레이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점했고, 프로그램 폐지를 청원하는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배우 김가연은 시청자의 과도한 해석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가 모욕성 댓글에 시달렸고, 결국 악플러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웃고 즐기자고 만든 게임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나?

오직 두뇌만으로 경쟁한다?

는 지난해 시작한 서바이벌 게임쇼로 현재 두 번째 시즌인 ‘룰 브레이커’로 이어지고 있다. 배우, 강사, 변호사, 프로게이머 등 다양한 직업의 출연자들이 모여 게임을 벌이는데 매회 한 사람씩 탈락해 마지막의 승자가 상금을 독식한다. 그런데 게임의 성격이 특이하다. ‘런닝맨’의 스파이 특집, 의 무지개색 꼬리 잡기 등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어느 정도 심리 게임의 특성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최소한의 육체적 능력을 배제하고 거의 100%의 두뇌 게임만을 다룬다. 힘이 약한 여성이 몸싸움이나 달리기에 뒤처지거나, 외모나 지명도가 떨어지는 후보가 시청자 투표에서 밀릴 우려가 없다. 그러니 오직 두뇌만으로 경쟁하는 건전한 게임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실상은 어떨까?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에서 게이머들은 생존과 탈락의 갈림길 앞에서 어두운 ‘쌩얼’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시청자는 이 게임에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이 사회를 투영한다.tvN 제공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에서 게이머들은 생존과 탈락의 갈림길 앞에서 어두운 ‘쌩얼’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시청자는 이 게임에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이 사회를 투영한다.tvN 제공

의 게임들은 매력적이다. 여러 시청자들이 일본 드라마 , 만화 , 여러 보드게임과의 유사성을 따지기도 하지만 게임 자체의 질이 높다. 나 자신도 보드게임을 섭렵해오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사기 경마’ ‘먹이사슬’ 같은 게임은 당장 친구들과 해보고 싶었다. 만약 게임 세트가 발매된다면 펜션에 친구들을 모아다놓고 진짜 게임을 진행해볼 생각도 있다. 그러나 순진한 마음으로 이 게임의 상자를 연 시청자들은 그 안에 몇 겹의 게임이 더 있음을 알게 된다.

시즌1의 초반에는 빨리 게임의 구조를 분석해 필승 비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유리해 보였다. 정치인 이준석은 제법 훌륭한 전략을 짰다. 그러나 이런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이 숨겨진 무기를 재빨리 꺼냈다.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배신으로 이준석은 전광석화처럼 탈락한다. 하나둘 실력자들이 눈에 뜨이고, 곧 그들의 무대가 되겠구나 싶다. 천만에! 출연자들은 머지않아 이 게임들이 단순히 혼자만 잘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수가 모여 정보를 공유하면 자기 카드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금세 바보가 된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도박사 차민수는 불과 3회 만에 탈락한다. 그렇게 악마가 내려온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란한 화술로 동료를 규합하고,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영리하게 배신하면서도 치명적인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능력자냐 매력적 인물이냐

는 시청자에게도 시소를 타게 한다. “당신은 공정한 게임을 통해 최고의 능력자가 우승하기를 바라죠?” “네, 물론이죠.” “그렇다면 실력은 떨어지지만 매력적인 인물이 운과 기회를 잡아 멋지게 역전하는 건 어떤가요?” “그것도 재미있겠는데요.” 좌우로 요동치는 이 시소의 각도에 따라 누구를 응원하느냐가 달라진다. 어떤 이는 김구라가 능란한 화술로 게임을 주물럭거리는 걸 즐겁게 바라본다. 어떤 이는 홍진호가 게이머의 집념으로 카드 뒷면의 모양이 다른 것을 찾아내는 데 탄복한다. 어떤 이는 김경란이 여성적인 친화력과 아나운서의 냉정함으로 최종 우승자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정직한 인간, 의리만 찾는 인간은 이길 수 없다. 이 프로그램에 전형적인 영웅은 존재할 수 없다.

제작진은 애초에 무인도 같은 외딴 공간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벌이려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리얼리티쇼를 계획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의 인디언 포커도, 의 물고기잡기 미션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게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프로그램은 처럼 소수 보드게임 마니아들의 입에 오른 뒤 곧 사라졌을 것이다. 가 이만큼의 관심을 얻은 것은 생존과 탈락이라는 갈림길 사이에서 드러나는 출연자들의 ‘쌩얼’ 때문이었다.

배신, 기만, 편가르기… 출연자들의 마음속에서 기어나온 어둠의 카드들이 지뢰처럼 깔려나갔다. 그리고 지난 1월11일 이두희가 예기치 않은 실수로 이 지뢰들을 연달아 밟고 장렬히 폭사했다. 이른바 ‘방송인 연맹’에 의해 신분증을 절도당한 뒤 왕따의 신세가 되고, 이상민이 내민 가짜 불멸의 징표로 기만당하고, 데스매치에서 은지원에게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그런데 이 폭사가 더욱 극적인 반전을 만들어냈다. 정작 운명의 단두대에 선 것은 봉기한 대중에게 끌려나온 네 명의 지뢰 매설자들이었다. 여러 죄목이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연예인들의 친목 도모와 협잡으로 비연예인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결과적으로 ‘연예인 연맹’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애초에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본다. 시즌1의 우승자인 홍진호와 프로게이머 임요한이 강력한 상대로 낙인찍히자, 이상민을 중심으로 재빨리 약자들의 연합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물론 이런 상태가 고착된다면 게임이든 방송이든 재미없어진다. 제작진은 개인전 같은 요소를 적절히 넣어두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실수는 이두희가 신분증을 잃어버렸을 때 빠른 유권해석으로 ‘절도’를 방지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런 뜻밖의 상황이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놀이와 게임은 경계선이 명료할 때 더 자유롭게 놀 수 있다. ‘룰 브레이커’라는 부제 때문인지 이번 시즌에 유독 이런 요소가 많다. 먹이사슬 게임 때, 홍진호는 상대편이 사용할 스티커를 완력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게이머들은 점점 어디까지 가능한지 헷갈리게 되고, 결국 넘지 않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린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암묵적 왕따

한국 보드게임의 대명사인 의 원형은 게임이다. 원래 191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 수업을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자본주의에서 독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모델로 이용되었다. 지금 의 시청자 역시 게임 속에 이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 그들이 응원하는 게이머들은 원래의 직업·재산·명망·권력과 같은 계급장을 떼고 등장한다. 그야말로 고전적 자유주의가 그리던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게 된 것은 다수의 암묵적 기만으로 한 사람이 왕따가 되는 모습이다. 기득권자들의 친목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다. 그리고 누구도 부당한 게임판 자체를 엎으려 하지 않는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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